[8/4]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202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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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30,1-2.12-15.18-22 / 마태15,1-2.10-14>


유독 바른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기어이 한마디를 하고야 말지요. 어쩌면 그 순간 침묵하는 것이 불의와 타협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양심에 큰 가책을 느끼는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며 던진 말들은 그 의도와 상관없이 자주 폭력적으로 사람들에게 전해집니다. 과연, 정신과 의사인 정혜신 선생님이 이야기하듯, 욕설에 찔려 넘어진 사람보다 바른말에 찔려 넘어진 사람이 한 만 배는 더 많을 것도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어느 모로 이와 비슷하다고 여겨집니다. 어려서부터 율법 조항 하나하나를 절대시한 그들로서는,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이나, 또 그것을 보고도 묵인하는 것 모두가 용납할 수 없는 잘못이었던 것이겠지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포함해서, 외적인 율법 조항을 어긴 모든 이들에게 바른말을 건넬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경험에서 알듯이, 이런 바른말이 대부분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말을 하는 쪽에서야 상대가 고마워하고 무언가 배울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대개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자기 사정을 이해받지 못했다고 느끼고, 더 나아가 그 바른말에 찔려 위축된 자신을 체험하게 되니 말입니다. 더욱이 그 지적이 손을 씻는 것과 같은 외적인 차원이라면, 자칫 상대를 위선적인 사람으로 몰아갈 위험마저 있는 것이겠지요. 말 그대로 눈먼 이가 인도해 둘 다 위선의 구덩이에 빠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과 같은 외적 요소가 아니라, 입에서 말을 나오게 하는 마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율법도 외적인 조항들로 구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조항 자체를 지키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지요. 오히려 외적인 요소들은 내적인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장치들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만일,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이를 깨달았더라면,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기에 앞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했을 것입니다.


간혹, 하느님께서 우리 잘못에 대해 정의롭게 바른말만 하시면 어떨까 상상해봅니다. 아마 부끄럽고 위축되어 그분 앞에 감히 서 있지도 못하겠지요. 그런데 다행히도 오늘 제1독서가 이야기하듯, 하느님께서는 잘못한 이들마저 영예롭게 하시고, 멸시당하지 않게 해주시겠다고, 그리고 기꺼이 하느님이 되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드러난 잘잘못을 지적하기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나약함을 연민으로 보듬어주시는 것이지요. 외적 조항에 대한 폭력적인 강요가 아닌, 바로 이 연민의 마음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스며들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습니다.


아버지의 자녀들인 우리도 외적 판단과 바른말에 앞서, 연민으로 보이지 않는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게 되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은총을 함께 청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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