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13,1-9.15-17.19-30.33-62 / 요한8,1-11>
잘못하면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합당한 처벌 없이 그냥 없었던 일인 양 잊어버리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지요. 그래서 우리 사회는 법을 정하고 그에 따른 적절한 처벌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규정은 참 중요합니다. 감정에 따라 너무 과하거나 모자르지 않게, 다시 말해서 누구나 공정하게 벌을 받게 해주니 말이지요.
그런데 이렇듯 잘못에 따른 처벌을 너무 기계적으로 도식화하면 간과되는 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처벌의 궁극적인 목적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처벌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처벌은 증오를 쏟아내고 복수하는 단죄가 아니라, 교정하여 회복시키는 치유 과정이지요. 만일, 이러한 목적을 기억한다면, 처벌조차도 그 사람의 선익을 위해 이루어져야 함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죄의 연대성에 대한 무감각도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1935년 미국 대공황 시기, 배가 고파 빵을 훔친 노인에 대한 재판에서, 라과르디아 판사가 그 노인과 더불어 이런 아픔을 못 본 체 하고 좋은 것으로 배를 채웠던 자신과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까지 벌금을 부과했던 일화는 명판결로 아직까지 회자되곤 하지요. 과연, 어떤 잘못도 개인만의 잘못인 경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충분히 돌보지 않고, 무관심하고, 인색할 때, 우리는 어느 모로 그 잘못의 공동 책임자들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궁극적인 심판은 내가 아니라 주님께서 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수없이 죄를 지으면서 하느님 자비에 기대어 사는 우리가 어떻게 남을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누군가의 잘못이 겉으로 드러날 때마다, 우리는 드러나지 않은 자기 안의 잘못을 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감히 그 사람에 대해 심판하려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두의 잘못에 대해 함께 자비를 청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끝으로, 정의의 완성은 용서와 자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방식이 늘 그렇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잘못을 저지르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신 것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지요.(요한3,17) 그리고 수많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용서하고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도 그렇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매순간 초대하십니다. 우리 삶을 통해서,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야고3,13)는 말씀을 증거하게 하시는 것이지요.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자를 예수님께서 대하시는 모습을 통해서, 잘못한 이들을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지 배우게 됩니다. 그 사람의 선익을 지향하고, 나 역시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기억하고, 심판이 아닌 자비가 그 사람을 변화시키리라 믿고 함께 기도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잃을 뻔 했던 한 사람을 얻으셨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우리도 매순간 사람들을 대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

<다니13,1-9.15-17.19-30.33-62 / 요한8,1-11>
잘못하면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합당한 처벌 없이 그냥 없었던 일인 양 잊어버리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지요. 그래서 우리 사회는 법을 정하고 그에 따른 적절한 처벌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규정은 참 중요합니다. 감정에 따라 너무 과하거나 모자르지 않게, 다시 말해서 누구나 공정하게 벌을 받게 해주니 말이지요.
그런데 이렇듯 잘못에 따른 처벌을 너무 기계적으로 도식화하면 간과되는 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처벌의 궁극적인 목적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처벌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처벌은 증오를 쏟아내고 복수하는 단죄가 아니라, 교정하여 회복시키는 치유 과정이지요. 만일, 이러한 목적을 기억한다면, 처벌조차도 그 사람의 선익을 위해 이루어져야 함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죄의 연대성에 대한 무감각도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1935년 미국 대공황 시기, 배가 고파 빵을 훔친 노인에 대한 재판에서, 라과르디아 판사가 그 노인과 더불어 이런 아픔을 못 본 체 하고 좋은 것으로 배를 채웠던 자신과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까지 벌금을 부과했던 일화는 명판결로 아직까지 회자되곤 하지요. 과연, 어떤 잘못도 개인만의 잘못인 경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충분히 돌보지 않고, 무관심하고, 인색할 때, 우리는 어느 모로 그 잘못의 공동 책임자들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궁극적인 심판은 내가 아니라 주님께서 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수없이 죄를 지으면서 하느님 자비에 기대어 사는 우리가 어떻게 남을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누군가의 잘못이 겉으로 드러날 때마다, 우리는 드러나지 않은 자기 안의 잘못을 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감히 그 사람에 대해 심판하려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두의 잘못에 대해 함께 자비를 청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끝으로, 정의의 완성은 용서와 자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방식이 늘 그렇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잘못을 저지르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신 것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지요.(요한3,17) 그리고 수많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용서하고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도 그렇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매순간 초대하십니다. 우리 삶을 통해서,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야고3,13)는 말씀을 증거하게 하시는 것이지요.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자를 예수님께서 대하시는 모습을 통해서, 잘못한 이들을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지 배우게 됩니다. 그 사람의 선익을 지향하고, 나 역시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기억하고, 심판이 아닌 자비가 그 사람을 변화시키리라 믿고 함께 기도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잃을 뻔 했던 한 사람을 얻으셨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우리도 매순간 사람들을 대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