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2,18-24 / 히브2,9-11 / 마르10,2-16>
대개 한몸이라고 하면, '일심동체'라는 말과 함께 운명 공동체가 되어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된 사람들을 일컬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한몸을 이야기하면 그 구성원들 간의 신뢰와 단합이 주로 강조되지요.
그런데 이렇게만 한몸을 이해하면 그 몸을 구성하는 지체들 간의 협력과 상호작용은 설명할 수 있을지언정, 다른 몸뚱이와의 관계는 간과되기 십상입니다. 물론, 우리 몸은 피부로 경계가 분명히 정해진 듯 보이기에, 다른 사람의 몸과 단절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몸은 고립이 아닌 관계를 위해 주어졌습니다.
만일 몸이 없다면 우리는 눈과 귀가 없기에 누군가를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을 뿐더러, 그 사람의 손을 마주 잡거나 부둥켜 안는 것도 불가능하겠지요. 상대에게 말과 표정으로 내 마음을 전할 수도 없을테고, 사랑에 빠져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을 느낄 수도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몸은 개체 간에 경계를 구분지어 마치 섬처럼 서로를 떨어뜨려놓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처럼 보이는 개체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 서로 소통할 수 있게 해준다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몸을 이룬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두 몸뚱아리가 붙어서 하나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두 사람이 밀접한 관계에 들어간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제1독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실 몸은 처음부터 관계를 전제한 것이었지요. 다시 말해서 몸은 그 내부만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밖을 향해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지향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몸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그리고 한몸을 이룬다는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상대와 관계맺는 방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그대로 보존되어야 하는 몸, 다른 것과 섞여 정체성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그런 몸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배타적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한몸을 이루는 우리 교회를 바라본다면,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는 구원의 방주는 될 수 있을 지언정, 아픈 이들과 연대하는 열린 공동체로 여겨지기는 어려울지 모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는 흠숭의 대상으로는 쉽게 이해되지만, 씹히고 먹힘으로써 경계를 부수어 하나가 되는 몸이라고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겠지요. 왜냐면 무엇보다 그 몸은 보호되고 보존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될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익숙함을 떠나 낯선 이와 한몸이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경계를 부수고 다른 세상을 만나 밀접한 관계에 들어서는 일입니다. 이때 몸은 폐쇄적이고 정형화된 몸이 아니라, 개방적이고 유연한 몸으로 이해되어 친교의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몸을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공동체로 교회를 이해하고, 또 그리스도의 몸을 모든 이를 위하여 깨지고 부서지는 몸, 그렇게 모두를 살리는 생명의 양식으로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10,9)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부부에게 하신 말씀이지요. 하지만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사람들은 본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친교를 나누도록 창조되었음을 기억할 때, 이 말씀은 그 친교를 깨뜨려서는 안된다는 말씀으로 묵상할 수 있겠습니다. 온 인류가 연결되어 서로 염려하고 보듬고 한몸을 이루려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복음 후반부에 보게 되는 예수님의 몸동작 또한 인상적입니다.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손을 얹어 축복해주시지요. 우리 몸은 그렇듯 아주 작은 이들마저 끌어안고 축복하며 서로에게 열려진 친교의 다리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맺어주신 형제자매들과의 관계가 온 인류로 확장되고, 또 그들과 한몸처럼 함께 기뻐하고 아파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한몸이 될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을 함께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

<창세2,18-24 / 히브2,9-11 / 마르10,2-16>
대개 한몸이라고 하면, '일심동체'라는 말과 함께 운명 공동체가 되어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된 사람들을 일컬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한몸을 이야기하면 그 구성원들 간의 신뢰와 단합이 주로 강조되지요.
그런데 이렇게만 한몸을 이해하면 그 몸을 구성하는 지체들 간의 협력과 상호작용은 설명할 수 있을지언정, 다른 몸뚱이와의 관계는 간과되기 십상입니다. 물론, 우리 몸은 피부로 경계가 분명히 정해진 듯 보이기에, 다른 사람의 몸과 단절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몸은 고립이 아닌 관계를 위해 주어졌습니다.
만일 몸이 없다면 우리는 눈과 귀가 없기에 누군가를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을 뿐더러, 그 사람의 손을 마주 잡거나 부둥켜 안는 것도 불가능하겠지요. 상대에게 말과 표정으로 내 마음을 전할 수도 없을테고, 사랑에 빠져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을 느낄 수도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몸은 개체 간에 경계를 구분지어 마치 섬처럼 서로를 떨어뜨려놓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처럼 보이는 개체들 사이에 다리를 놓아 서로 소통할 수 있게 해준다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몸을 이룬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두 몸뚱아리가 붙어서 하나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두 사람이 밀접한 관계에 들어간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제1독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실 몸은 처음부터 관계를 전제한 것이었지요. 다시 말해서 몸은 그 내부만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밖을 향해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지향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몸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그리고 한몸을 이룬다는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상대와 관계맺는 방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그대로 보존되어야 하는 몸, 다른 것과 섞여 정체성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그런 몸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배타적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한몸을 이루는 우리 교회를 바라본다면,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는 구원의 방주는 될 수 있을 지언정, 아픈 이들과 연대하는 열린 공동체로 여겨지기는 어려울지 모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는 흠숭의 대상으로는 쉽게 이해되지만, 씹히고 먹힘으로써 경계를 부수어 하나가 되는 몸이라고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겠지요. 왜냐면 무엇보다 그 몸은 보호되고 보존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될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익숙함을 떠나 낯선 이와 한몸이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경계를 부수고 다른 세상을 만나 밀접한 관계에 들어서는 일입니다. 이때 몸은 폐쇄적이고 정형화된 몸이 아니라, 개방적이고 유연한 몸으로 이해되어 친교의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몸을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공동체로 교회를 이해하고, 또 그리스도의 몸을 모든 이를 위하여 깨지고 부서지는 몸, 그렇게 모두를 살리는 생명의 양식으로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10,9)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부부에게 하신 말씀이지요. 하지만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사람들은 본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친교를 나누도록 창조되었음을 기억할 때, 이 말씀은 그 친교를 깨뜨려서는 안된다는 말씀으로 묵상할 수 있겠습니다. 온 인류가 연결되어 서로 염려하고 보듬고 한몸을 이루려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복음 후반부에 보게 되는 예수님의 몸동작 또한 인상적입니다.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손을 얹어 축복해주시지요. 우리 몸은 그렇듯 아주 작은 이들마저 끌어안고 축복하며 서로에게 열려진 친교의 다리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맺어주신 형제자매들과의 관계가 온 인류로 확장되고, 또 그들과 한몸처럼 함께 기뻐하고 아파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한몸이 될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을 함께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