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4,1-2.6-8 / 야고1,17-18.21ㄴ-22.27 / 마르7,1-8.14-15.21-23>
코로나 시대가 계속되면서 전보다 손을 씻는 것이 더 일상이 된 것 같습니다. 실내 공간에 들어갈 때면 어김없이 손소독제로 손을 닦고, 또 버스에서 내릴 때 역시 손소독제로 손을 씻지요. 그리고 밖에 나갔다 집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비누로 손을 씻는 일입니다. 혹시라도 묻어있을 수 있는 바이러스의 흔적을 없애고,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지적하는 것도 일면 비슷해 보입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손 씻기는 밖에서 더러운 것이 묻었을 수도 있으니 건강을 위해 손을 닦아야 한다는 위생적 차원의 권고가 아니었습니다. 이 손 씻기는 누군가 혹은 어떤 사물과 접촉해서 혹시라도 불결하게 됐을지 모르는 손을 닦아, 종교적인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나오는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는 것도, 장터에서 이방인이나 병자 등과 같은 부정한 사람과 접촉하거나, 부정한 사물에 손을 대 거룩함을 잃어버렸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행동입니다.
이렇듯 종교적인 정결을 지키려는 노력은 우상을 숭배하던 이방인과 관련되었을 때 더 강조되곤 했습니다. 예컨대, 레위기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외국 땅을 차지했을 때, 5년 동안은 그 밭에서 난 열매를 먹지 말라는 규정이 나오기까지 합니다. (레위19:23) 이는 이방인의 모든 흔적이 사라질 때까지, 다시 말해서 이방 ‘물’이 다 빠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던 것이지요. 이방인을 “개”라고 부를 만큼 부정하게 여겼던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듯 부정한 것으로부터 거룩함을 유지한다는 명목하에, 정결례와 관련된 세칙들이 너무 많이 등장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손 씻기 규정도 그 가운데 하나인데, 본래 이 규정은 만남의 천막, 곧 성전 안에 들어가기 전 사제들에게 요구되었던 손 씻기 규정이었다고 하지요. (탈출30:17-21) 그런데 언젠가부터 부정을 정화해야 한다는 이유로, 모든 이들에게 강요되는 전통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어느 모로 거룩함을 유지하려는 그 노력을 좋게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대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손을 씻고 몸을 씻는 등의 외적인 행위가 거룩함을 보장해준다는 오해가 그것입니다. 말하자면, 씻는 행위 하나로 거룩해지기 위한 모든 노력을 ‘퉁’ 칠 수 있다고 여겼다는 것이지요. 그 결과, 세세한 규정까지 잘 지키는 이들은 스스로 거룩하다고 자부하는 것은 물론, 부정한(?) 다른 이들을 무시하는 것조차 정당하게 여길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하느님 백성의 신앙은 점차 외적인 규정의 준수로 변질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의 씻음’ 없는 ‘외적인 씻음’은 남들에게 거룩하게 보이려는 위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사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사람 안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에, 마음의 변화 없이 거룩함을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생각해보면, 정결례의 세칙을 그렇게나 많이 만들었던 것도, 본능적으로 ‘외적인 씻음’만으로 부족함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부족하게 느껴지니 규정은 추가하는데, 그 부족함이 채워지지 않으니 계속 규정을 늘려가며 마치 결벽증처럼 ‘씻음’에 집착했으리라는 것이지요.
또 다른 문제는, 과연 거룩함과 속된 것을 인간이 판단해서 구분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거룩하고 속된 것인지, 또 누가 거룩하고 누가 속된 사람인지 한 치의 오류 없이 완벽하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성(聖)과 속(俗), 혹은 선과 악을 스스로 규정하려고 시도한다면, 이는 하느님처럼 되려 했던 아담과 하와의 교만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제시하시는 길이 아닌, 내가 보기에 좋아 보이는 길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나는 물론 사람들에까지 강요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자기 뜻을 하느님의 가르침으로 포장해서 가르치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마치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더 중시했던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몇 차례에 걸쳐 인용하셨던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을 떠올려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호세6,6) 거룩함을 외적인 규정으로 ‘퉁’ 치려는 이들에게, 답답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내적 회개와 마음의 정화를 호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길이 아닌,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길, 곧 사랑과 자비의 길을 우리가 걸어가야 함을 다시금 기억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참으로 거룩한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그 어떤 외적인 기준이나, 개인적인 판단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그 사랑과 자비를 닮아가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그분의 그 거룩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날로 변모될 수 있기를 기도하며, 이를 위해 필요한 은총을 함께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

<신명4,1-2.6-8 / 야고1,17-18.21ㄴ-22.27 / 마르7,1-8.14-15.21-23>
코로나 시대가 계속되면서 전보다 손을 씻는 것이 더 일상이 된 것 같습니다. 실내 공간에 들어갈 때면 어김없이 손소독제로 손을 닦고, 또 버스에서 내릴 때 역시 손소독제로 손을 씻지요. 그리고 밖에 나갔다 집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비누로 손을 씻는 일입니다. 혹시라도 묻어있을 수 있는 바이러스의 흔적을 없애고,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지적하는 것도 일면 비슷해 보입니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들이 말하는 손 씻기는 밖에서 더러운 것이 묻었을 수도 있으니 건강을 위해 손을 닦아야 한다는 위생적 차원의 권고가 아니었습니다. 이 손 씻기는 누군가 혹은 어떤 사물과 접촉해서 혹시라도 불결하게 됐을지 모르는 손을 닦아, 종교적인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나오는 장터에서 돌아온 뒤에 몸을 씻는 것도, 장터에서 이방인이나 병자 등과 같은 부정한 사람과 접촉하거나, 부정한 사물에 손을 대 거룩함을 잃어버렸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행동입니다.
이렇듯 종교적인 정결을 지키려는 노력은 우상을 숭배하던 이방인과 관련되었을 때 더 강조되곤 했습니다. 예컨대, 레위기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외국 땅을 차지했을 때, 5년 동안은 그 밭에서 난 열매를 먹지 말라는 규정이 나오기까지 합니다. (레위19:23) 이는 이방인의 모든 흔적이 사라질 때까지, 다시 말해서 이방 ‘물’이 다 빠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던 것이지요. 이방인을 “개”라고 부를 만큼 부정하게 여겼던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듯 부정한 것으로부터 거룩함을 유지한다는 명목하에, 정결례와 관련된 세칙들이 너무 많이 등장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손 씻기 규정도 그 가운데 하나인데, 본래 이 규정은 만남의 천막, 곧 성전 안에 들어가기 전 사제들에게 요구되었던 손 씻기 규정이었다고 하지요. (탈출30:17-21) 그런데 언젠가부터 부정을 정화해야 한다는 이유로, 모든 이들에게 강요되는 전통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어느 모로 거룩함을 유지하려는 그 노력을 좋게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대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손을 씻고 몸을 씻는 등의 외적인 행위가 거룩함을 보장해준다는 오해가 그것입니다. 말하자면, 씻는 행위 하나로 거룩해지기 위한 모든 노력을 ‘퉁’ 칠 수 있다고 여겼다는 것이지요. 그 결과, 세세한 규정까지 잘 지키는 이들은 스스로 거룩하다고 자부하는 것은 물론, 부정한(?) 다른 이들을 무시하는 것조차 정당하게 여길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하느님 백성의 신앙은 점차 외적인 규정의 준수로 변질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의 씻음’ 없는 ‘외적인 씻음’은 남들에게 거룩하게 보이려는 위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사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사람 안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에, 마음의 변화 없이 거룩함을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생각해보면, 정결례의 세칙을 그렇게나 많이 만들었던 것도, 본능적으로 ‘외적인 씻음’만으로 부족함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부족하게 느껴지니 규정은 추가하는데, 그 부족함이 채워지지 않으니 계속 규정을 늘려가며 마치 결벽증처럼 ‘씻음’에 집착했으리라는 것이지요.
또 다른 문제는, 과연 거룩함과 속된 것을 인간이 판단해서 구분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거룩하고 속된 것인지, 또 누가 거룩하고 누가 속된 사람인지 한 치의 오류 없이 완벽하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성(聖)과 속(俗), 혹은 선과 악을 스스로 규정하려고 시도한다면, 이는 하느님처럼 되려 했던 아담과 하와의 교만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 제시하시는 길이 아닌, 내가 보기에 좋아 보이는 길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나는 물론 사람들에까지 강요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자기 뜻을 하느님의 가르침으로 포장해서 가르치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요! 마치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더 중시했던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몇 차례에 걸쳐 인용하셨던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을 떠올려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호세6,6) 거룩함을 외적인 규정으로 ‘퉁’ 치려는 이들에게, 답답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내적 회개와 마음의 정화를 호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길이 아닌,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길, 곧 사랑과 자비의 길을 우리가 걸어가야 함을 다시금 기억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참으로 거룩한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그 어떤 외적인 기준이나, 개인적인 판단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그 사랑과 자비를 닮아가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그분의 그 거룩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날로 변모될 수 있기를 기도하며, 이를 위해 필요한 은총을 함께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