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는 비슷합니다.
다양한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있고, 다양한 세상 안의 문제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 안에서 다양한 이유로 고통 받고, 슬퍼하고, 절망하기도 하고,
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행복한 순간들을 보내기도 합니다.
살아가는 것이 고통스러워 인간적 한계에 봉착하는 순간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겪고 싶지는 않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겪게 되는 고통의 순간에도 차이는 있습니다.
같은 한계의 상황, 위기의 상황에 놓인다고 해도
그 인간적 한계와 고통의 시간을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 1 독서에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박해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아픔과 고통은
다른 이들이 볼 때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이고,
신앙인들이 볼 때에도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들게 하는 순간들입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사람들은 그것을 세상에 하느님 말씀과 사랑을 전하는
특별한 은총의 시기로 보내며, 말씀이 퍼져나가는 것에 대해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이처럼 누구나 겪는 인간적 한계와 고통을
절망과 죽음이 아닌 기쁨과 희망으로 바꾸는 힘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느끼는 배고픔과 목마름의 차이에서 올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배고픔과 목마름에 대해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비롯하여 역사의 수많은 성인들과 우리의 선배들이
예수님처럼, 하느님에 대해 배고파하고 목말라했음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우고 키워갈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삶의 자리(공동체-가정, 수도회, 교회)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자신이 속한 삶의 자리(공동체)는 3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느님 말씀을 듣게 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하느님 말씀을 전례나 성경을 통해 들을 수 있고,
(수도)가족이나 이웃들로부터 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말씀이나 다른 이들의 입술과 마음을 통해
우리의 닫혀진 마음에게 다가오는 순간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공동체(가정, 수도회, 교회)는
귀먹은 우리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좋은 자리이기도 합니다.
둘째, 포기를 훈련시켜줍니다.
자신이 속해있는 공동체는 자신이 그곳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알려줍니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할 것, 포기해야 할 것을 분명하게 합니다.
셋째, 기도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시켜줍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는 언제나 세상적 갈망에 여전히 휘둘리며 고통과 인간적 갈등 속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기도는 아버지의 뜻을 찾아가는 이 길이
바른 길인지 확인하는 시간이며, 하느님께 함께해주시길 청하는 감사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목적이 무엇이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게 하는 시간입니다.
공동체가 함께 기도할 때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확인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 순간 말씀을 듣고, 포기하는 것이 좋은 것이고, 기쁜 일일뿐만 아니라,
자신이 공동체(가족, 수도회) 구성원들 모두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이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세상을 다르게 경험하는 방식을
오늘 시작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 '목마르다'(요한 19,28) 하신 당신의 말씀이 저에게 하시는 것인가요? 오늘 당신의 목마름을 채울 수 있는 한 사랑이 되고 싶습니다. 아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리는 비슷합니다.
다양한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있고, 다양한 세상 안의 문제들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 안에서 다양한 이유로 고통 받고, 슬퍼하고, 절망하기도 하고,
또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행복한 순간들을 보내기도 합니다.
살아가는 것이 고통스러워 인간적 한계에 봉착하는 순간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겪고 싶지는 않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겪게 되는 고통의 순간에도 차이는 있습니다.
같은 한계의 상황, 위기의 상황에 놓인다고 해도
그 인간적 한계와 고통의 시간을 사람들은 서로 다르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 1 독서에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박해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아픔과 고통은
다른 이들이 볼 때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이고,
신앙인들이 볼 때에도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들게 하는 순간들입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사람들은 그것을 세상에 하느님 말씀과 사랑을 전하는
특별한 은총의 시기로 보내며, 말씀이 퍼져나가는 것에 대해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이처럼 누구나 겪는 인간적 한계와 고통을
절망과 죽음이 아닌 기쁨과 희망으로 바꾸는 힘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느끼는 배고픔과 목마름의 차이에서 올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배고픔과 목마름에 대해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비롯하여 역사의 수많은 성인들과 우리의 선배들이
예수님처럼, 하느님에 대해 배고파하고 목말라했음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우고 키워갈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삶의 자리(공동체-가정, 수도회, 교회)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자신이 속한 삶의 자리(공동체)는 3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느님 말씀을 듣게 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하느님 말씀을 전례나 성경을 통해 들을 수 있고,
(수도)가족이나 이웃들로부터 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말씀이나 다른 이들의 입술과 마음을 통해
우리의 닫혀진 마음에게 다가오는 순간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공동체(가정, 수도회, 교회)는
귀먹은 우리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좋은 자리이기도 합니다.
둘째, 포기를 훈련시켜줍니다.
자신이 속해있는 공동체는 자신이 그곳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알려줍니다.
그런 가운데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할 것, 포기해야 할 것을 분명하게 합니다.
셋째, 기도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시켜줍니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는 언제나 세상적 갈망에 여전히 휘둘리며 고통과 인간적 갈등 속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기도는 아버지의 뜻을 찾아가는 이 길이
바른 길인지 확인하는 시간이며, 하느님께 함께해주시길 청하는 감사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목적이 무엇이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게 하는 시간입니다.
공동체가 함께 기도할 때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확인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 순간 말씀을 듣고, 포기하는 것이 좋은 것이고, 기쁜 일일뿐만 아니라,
자신이 공동체(가족, 수도회) 구성원들 모두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이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세상을 다르게 경험하는 방식을
오늘 시작해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주님, '목마르다'(요한 19,28) 하신 당신의 말씀이 저에게 하시는 것인가요? 오늘 당신의 목마름을 채울 수 있는 한 사랑이 되고 싶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