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에 벳자타 연못에서 38년간 누워있던 환자를 고쳐주신 일이 있은 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러한 이들을 바라보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에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죽음의 세계를 사는 것은 무엇이고,
생명의 세계를 사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이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믿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가
생명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단순히 말씀을 듣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요한복음을 비롯하여 성경의 모든 곳에서 반복해서 말하는 것처럼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들처럼 38년간 누워있던 사람을 치유한 것보다
그가 일어나도록 한 일과 그가 걸어간 일 때문에
안식일의 노동 금지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고 죄를 운운한다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입니까?
아니면 삶의 여러 규칙들입니까?
제가 베트남에서 선교사로 일하던 8월 어느 날 오토바이 사고로 왼쪽 팔목이 부러졌습니다.
사고 후 베트남 신학생들이 저를 똥녓(통일)병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 응급실에 도착하고 1시간이 지나도록 병원 의사와 간호사들은
제 부러진 팔목에 간단히 부목을 대 놓고는 정작 다른 치료를 해 주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병원은 베트남 군인 전용(육군 병원 같은 것)으로
한 번도 외국인을 치료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응급실의 의사들은 어떻게 해야 될 지 몰라
그 늦은 시간에 상급자에게 전화를 연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규정에 없다는 것이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결국 저는
더 이상 치료를 해 줄 수 없다는 말에 다른 병원으로 가야 했습니다.
우리 맘에는 그런 규정들이 없을까요?
선입견이라는 것이 그런 것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한 번, 두 번 보고는 "아 , 저 사람은 이런 것 같아. 저런 것 같아"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보이지 않는 자신만의 규정에 묶여
그 사람의 내면에 담긴 하느님의 창조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초대하시는 생명의 세계는
바로 사람들이 가진 선함과 기쁨과 행복과 평화를 발견해 나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 안에 내재되어 있고 변화무쌍한 하느님의 생명을
살아날 수 있도록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렇게 하셨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그렇게 하셨고,
제자들이 그렇게 했으니 이제는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차례입니다.
우리는 자주 나와 만나는 다른 사람 때문에 “죽겠다.”고 말합니다.
관계가 어렵고, 내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화나고 답답해서 “죽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죽지말고 사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의 생각과 나의 원칙과 나의 선입관으로 먼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멈추고,
상대의 생각과 상대의 바람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노력해야 하고,
서로가 이루어갈 인간적 관계 안에서 도움이 되고 희망을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주님, 저희가 당신의 자유를 알게 하소서. 당신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당신이 기뻐하실 일이라면 주저없이 모든 것에서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저희가 알게 하소서. 아멘."

안식일에 벳자타 연못에서 38년간 누워있던 환자를 고쳐주신 일이 있은 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러한 이들을 바라보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에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죽음의 세계를 사는 것은 무엇이고,
생명의 세계를 사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이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믿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가
생명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단순히 말씀을 듣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요한복음을 비롯하여 성경의 모든 곳에서 반복해서 말하는 것처럼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들처럼 38년간 누워있던 사람을 치유한 것보다
그가 일어나도록 한 일과 그가 걸어간 일 때문에
안식일의 노동 금지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고 죄를 운운한다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입니까?
아니면 삶의 여러 규칙들입니까?
제가 베트남에서 선교사로 일하던 8월 어느 날 오토바이 사고로 왼쪽 팔목이 부러졌습니다.
사고 후 베트남 신학생들이 저를 똥녓(통일)병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 응급실에 도착하고 1시간이 지나도록 병원 의사와 간호사들은
제 부러진 팔목에 간단히 부목을 대 놓고는 정작 다른 치료를 해 주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병원은 베트남 군인 전용(육군 병원 같은 것)으로
한 번도 외국인을 치료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응급실의 의사들은 어떻게 해야 될 지 몰라
그 늦은 시간에 상급자에게 전화를 연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규정에 없다는 것이죠.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결국 저는
더 이상 치료를 해 줄 수 없다는 말에 다른 병원으로 가야 했습니다.
우리 맘에는 그런 규정들이 없을까요?
선입견이라는 것이 그런 것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한 번, 두 번 보고는 "아 , 저 사람은 이런 것 같아. 저런 것 같아"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보이지 않는 자신만의 규정에 묶여
그 사람의 내면에 담긴 하느님의 창조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초대하시는 생명의 세계는
바로 사람들이 가진 선함과 기쁨과 행복과 평화를 발견해 나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 안에 내재되어 있고 변화무쌍한 하느님의 생명을
살아날 수 있도록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렇게 하셨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그렇게 하셨고,
제자들이 그렇게 했으니 이제는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할 차례입니다.
우리는 자주 나와 만나는 다른 사람 때문에 “죽겠다.”고 말합니다.
관계가 어렵고, 내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화나고 답답해서 “죽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죽지말고 사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의 생각과 나의 원칙과 나의 선입관으로 먼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멈추고,
상대의 생각과 상대의 바람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노력해야 하고,
서로가 이루어갈 인간적 관계 안에서 도움이 되고 희망을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주님, 저희가 당신의 자유를 알게 하소서. 당신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당신이 기뻐하실 일이라면 주저없이 모든 것에서 떠날 수 있는 자유를 저희가 알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