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기도를 마치신 뒤 12제자를 뽑으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오셔서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산 아래 자신들의 자리에서 기다리던 이들이었고,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을 주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 가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루가 복음은 5장-9장까지 설교와 기적 등을 통해 모두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오늘 우리가 듣는 4가지 행복선언과 4가지 불행선언은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이 보다 집약적이며 종말론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인은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있는 이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미움 받고 멸시 받는 이들을
“지금” 자신의 삶 가까이에서 보고 만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픔, 고통, 슬픔, 멸시, 인간 소외, 질병, 기아, 고독 … 등
인간의 온갖 어려움에 대해 마음을 열어 관심을 돌릴 줄 아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생활이 만족스러워지고 풍요로워지고, 행복해지면서
다른 이들의 아픔을 바라보는 데 둔감해지는 것을
예수님은 “불행하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생활 영역이 좁아지고 생각의 틀이 한정적이 되어갈수록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인간에 대한 근원적 이해의 힘이 떨어지는 사람이 될수록
다른 사람과 화합하지 못하고, 분노를 다스리거나, 마음을 갈무리하는 게 더 힘들겠죠.
그런 사람은 자기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누구와도 싸웁니다.
그것이 심지어 부모가 되었던, 가족이 되었던, 동료가 되었던
자기 욕구가 우선이기에,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한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지금 행복하다, 만족스럽다 하며 즐거워하는 이들에게
그러한 만족 자체로만으로도 “불행”의 요소를 품을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즉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의미와 힘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자 하십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세상에는 많은 고통과 어려움이 있음을 보도록,
그래서 더 많은 동정심이 필요하며 더 많은 형제애와 선행이 필요함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복음적 감수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깊은 마음을 지닐수록,
우리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아픔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신비와 하느님의 신비에 대해서도 더 섬세하게 가려낼 수 있는 것이죠.
행복과 불행은 마음에 있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예수님 전하는 4가지 행복과 불행에 관한 선언에서도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그리고 사람답게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외적 만족이나 물적 충족감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말씀으로부터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우리에게 “복음적 감수성”을
“지금” 지닌 그리스도인이 되길 요구하실 뿐만 아니라,
“지금”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바라보길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이것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지금 잠시 눈을 감고 저에게 어려움을 느끼는 이의 마음을 제 마음에 담으며 당신께 기도합니다. 그를 위해 당신의 은총을 청합니다. 아멘.”

산에서 기도를 마치신 뒤 12제자를 뽑으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오셔서 말씀하시기 시작하십니다.
당신의 말씀을 듣기 위해 산 아래 자신들의 자리에서 기다리던 이들이었고,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을 주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 가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루가 복음은 5장-9장까지 설교와 기적 등을 통해 모두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오늘 우리가 듣는 4가지 행복선언과 4가지 불행선언은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이 보다 집약적이며 종말론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인은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있는 이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미움 받고 멸시 받는 이들을
“지금” 자신의 삶 가까이에서 보고 만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픔, 고통, 슬픔, 멸시, 인간 소외, 질병, 기아, 고독 … 등
인간의 온갖 어려움에 대해 마음을 열어 관심을 돌릴 줄 아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생활이 만족스러워지고 풍요로워지고, 행복해지면서
다른 이들의 아픔을 바라보는 데 둔감해지는 것을
예수님은 “불행하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생활 영역이 좁아지고 생각의 틀이 한정적이 되어갈수록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인간에 대한 근원적 이해의 힘이 떨어지는 사람이 될수록
다른 사람과 화합하지 못하고, 분노를 다스리거나, 마음을 갈무리하는 게 더 힘들겠죠.
그런 사람은 자기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누구와도 싸웁니다.
그것이 심지어 부모가 되었던, 가족이 되었던, 동료가 되었던
자기 욕구가 우선이기에,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한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지금 행복하다, 만족스럽다 하며 즐거워하는 이들에게
그러한 만족 자체로만으로도 “불행”의 요소를 품을 수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즉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의미와 힘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자 하십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세상에는 많은 고통과 어려움이 있음을 보도록,
그래서 더 많은 동정심이 필요하며 더 많은 형제애와 선행이 필요함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복음적 감수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을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깊은 마음을 지닐수록,
우리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아픔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신비와 하느님의 신비에 대해서도 더 섬세하게 가려낼 수 있는 것이죠.
행복과 불행은 마음에 있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예수님 전하는 4가지 행복과 불행에 관한 선언에서도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그리고 사람답게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외적 만족이나 물적 충족감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말씀으로부터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우리에게 “복음적 감수성”을
“지금” 지닌 그리스도인이 되길 요구하실 뿐만 아니라,
“지금”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바라보길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이것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지금 잠시 눈을 감고 저에게 어려움을 느끼는 이의 마음을 제 마음에 담으며 당신께 기도합니다. 그를 위해 당신의 은총을 청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