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만찬 성목요일

2023-04-06
조회수 433

오늘날 우리는 참 편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교통수단과 전자통신 기기의 발달로 세상 어디에든 갈 수 있고, 가서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곳에 꼭 가지 않아도 많은 것을 우리가 사는 이 자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디에나 가서 볼 수 있고, 언제든 볼 수 있고, 무엇이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어디에서나, 언제나, 무엇이나 보게 되면서

우리는 참으로 보고 싶은 것도 많아졌고, 볼 것도 많아져서,

하루 종일 무엇인가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이 본 것들을 점점 기억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옛날에는 여행가서 멋진 사진을 찍어 앨범에 넣고 가끔 열어보았지만

이제는 디지털 카메라로 더 예쁘게 찍어서는 컴퓨터 안에 넣어두곤 보지 않습니다.

너무 많이 보고, 너무 많이 찍고, 너무 빨리 지나가서

“기억”에 남겨둘 여지가 점점 적어지고 있습니다.

기억의 편린들을 끄집어내서 돌아보는 것이 삶의 낭만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기억 속에 담긴 의미를 깊이 생각하기보다,

그저 행복한 기억, 상처 입은 기억이란 외면적인 사진들만 들여다보기 때문입니다.

자기 삶의 의미가 되지 못한 기억은 그저 “예쁜 사진” 또는 “아픈 사진”에 불과합니다.

 

오늘 우리는 200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또 보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이야기한 역사의 한 장면을 기억하고, 이 자리에서 재현합니다.

그날처럼 감동적이지 못할 것이고,

비장한 마음으로 마주하는 것처럼 생생하지는 않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어느 미사의 한 장면처럼 이 전례를 그냥 보고 지나가면

이 만찬 미사가 성주간 마지막의 특별한 볼거리로 지나가고 말겠죠.

 

우리가 가끔이라도 옛날 사진을 꺼내 보는 이유는

그 사진을 찍을 때 얼굴이 특별히 예쁘게 찍혀서 그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행복한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끔 옛날 일을 기억하며 추억에 잠기는 이유는

그때 자신에게 특별한 일이 있었고,

그 특별한 일이 자신의 삶에 의미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오늘 이 만찬을 기억하고 재현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도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주님이 그러하셨듯, 우리도 우리 삶의 자리에서 서로를 섬기며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보기만 하실 것입니까?

보는 것으로는 충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완전한 사랑을 산산이 부수어 우리에게 나눠주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뜨거운 눈물을 내어 우리 가슴에 절절히 부어주신 것을

오늘도 보고만 있는다면,

이 밤도 그저 여느 때처럼 지나가는 그저 그런 시간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 삶을 귀중하게 만들고 의미 있는 아름다운 삶으로 만들어 가는 것은

“빨리”, “많이” 보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며”, “깊이”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특별한 자리에 초대받았습니다.

자세히, 그리고 깊이, 예수님의 마음을 바라보는 특별한 사건을 만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우리가 매일 보는 수많은 것들 가운데서,

특히 우리가 매일 만나는 성찬례를 통해 보게 되는 주님의 얼굴과 사랑과 눈물을

오늘 다시 만나려는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만약 우리가 그때 간절했던 예수님의 눈을 마주한다면, 그리고 그분의 마음을 공감한다면,

우리가 만나게 되는 그날의 기억은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할 것입니다.

 

오늘, 그리고 가능하면 이 성삼일 동안

더 자주 그분의 뒤를 따라가며 예수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십시오.

깊이, 오래, 세심하고 자세하게 그분의 모습을 따라가며 그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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