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사람들에게 있어 영원한 생명은 얼마만큼의 위력을 가지고 있을까요?
오히려 영원한 생명에 대한 관심보다는 더 많은 재화를 얻어
보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사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성당문을 넘나들며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고 무엇을 찾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하며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의 당당한 질문에 대해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면서 …
“너는 이미 계명들을 다 알고 있다. 그런데 하나 부족한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자 청년은 어릴 적부터 모든 계명을 다 지켜왔습니다.
그는 모든 계명을 다 지켜왔기에 당연히 자신이 영원한 생명,
곧 하느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행복과 기쁨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가 봅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 안에 남겨진 불안과 갈등과 부족함을 느낍니다.
계명은 다 지켰지만 여전히 자신 안에 채워지지 않는 메마름을 느낍니다.
신앙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많은 이들이 오늘 복음의 부자 청년처럼
신앙을 사는 것이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는 것과 신앙을 살아가는 것 사이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난 도둑질도 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을 해치지지도 않았으며,
부모님을 부당하게 대하지도, 간음죄도 저지르지 않았으니,
나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계명을 지키지 않고 나쁜 일을 행하는 것은 좋은 것이긴 하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선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에게 소중한 것은 “자기 자신”이고,
그에게 더 소중한 것은 “자기 자신의 행복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더 이상 하느님이나 하느님의 뜻은 있지 않고,
오직 계명을 지키는 사람 혹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겠죠.
신앙생활은 심신 수양이나 윤리 규정을 지키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하느님을 닮고 하느님의 삶을 자기 자신이 살아가고자 하는 고백이자 응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부자 청년을 “사랑스런 눈으로” 쳐다보셨다고 합니다.
왜일까요?
그 청년이 계명을 잘 지키며 사는 것이 예뻐서 사랑스런 눈으로 쳐다 본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예수님께서 그 청년에게, 계명을 살아가는 데 먼저 꼭 필요한 것 한 가지는
예수님이 그를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듯이
“사랑스런 눈으로 다른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임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랑은 자기희생을 동반합니다.
자신의 아픔마저도 감수하면서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그 부자 청년에게 당신의 사랑에 용기있게 응답하길 원하시며
당신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눈과 마음으로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예”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돌아서고 맙니다.
사람들은 2000년 전과 지금이 다르다고 하나, 실제로는 다르지 않습니다.
그때 한 청년에게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듯이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도 선택의 순간은 분명히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도 2000년 전의 한 청년처럼 마음에 불안과 사랑에 대한 갈증이 일고,
좀 더 행복한 삶, 좀 더 기쁘고 평화로운 삶을 얻고 싶을 때 다시 예수님께 묻겠죠?
“주님,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무엇을 더 해야 합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다시 사랑 가득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받은 많은 은총을 너만의 것으로 삼지 말고 팔아
그 은총이 필요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라오너라.”하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 모두“예”라고 응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날 사람들에게 있어 영원한 생명은 얼마만큼의 위력을 가지고 있을까요?
오히려 영원한 생명에 대한 관심보다는 더 많은 재화를 얻어
보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사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성당문을 넘나들며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고 무엇을 찾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하며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의 당당한 질문에 대해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면서 …
“너는 이미 계명들을 다 알고 있다. 그런데 하나 부족한 것이 있다.
그것은 네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자 청년은 어릴 적부터 모든 계명을 다 지켜왔습니다.
그는 모든 계명을 다 지켜왔기에 당연히 자신이 영원한 생명,
곧 하느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행복과 기쁨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가 봅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 안에 남겨진 불안과 갈등과 부족함을 느낍니다.
계명은 다 지켰지만 여전히 자신 안에 채워지지 않는 메마름을 느낍니다.
신앙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많은 이들이 오늘 복음의 부자 청년처럼
신앙을 사는 것이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 착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는 것과 신앙을 살아가는 것 사이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난 도둑질도 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을 해치지지도 않았으며,
부모님을 부당하게 대하지도, 간음죄도 저지르지 않았으니,
나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계명을 지키지 않고 나쁜 일을 행하는 것은 좋은 것이긴 하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선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이에게 소중한 것은 “자기 자신”이고,
그에게 더 소중한 것은 “자기 자신의 행복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더 이상 하느님이나 하느님의 뜻은 있지 않고,
오직 계명을 지키는 사람 혹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 사람만이 있을 뿐이겠죠.
신앙생활은 심신 수양이나 윤리 규정을 지키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하느님을 닮고 하느님의 삶을 자기 자신이 살아가고자 하는 고백이자 응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부자 청년을 “사랑스런 눈으로” 쳐다보셨다고 합니다.
왜일까요?
그 청년이 계명을 잘 지키며 사는 것이 예뻐서 사랑스런 눈으로 쳐다 본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예수님께서 그 청년에게, 계명을 살아가는 데 먼저 꼭 필요한 것 한 가지는
예수님이 그를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듯이
“사랑스런 눈으로 다른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임을
말씀하시기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랑은 자기희생을 동반합니다.
자신의 아픔마저도 감수하면서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그 부자 청년에게 당신의 사랑에 용기있게 응답하길 원하시며
당신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눈과 마음으로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예”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돌아서고 맙니다.
사람들은 2000년 전과 지금이 다르다고 하나, 실제로는 다르지 않습니다.
그때 한 청년에게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듯이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도 선택의 순간은 분명히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도 2000년 전의 한 청년처럼 마음에 불안과 사랑에 대한 갈증이 일고,
좀 더 행복한 삶, 좀 더 기쁘고 평화로운 삶을 얻고 싶을 때 다시 예수님께 묻겠죠?
“주님,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무엇을 더 해야 합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다시 사랑 가득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받은 많은 은총을 너만의 것으로 삼지 말고 팔아
그 은총이 필요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라오너라.”하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 모두“예”라고 응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