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12,1-4ㄱ / 2티모1,8ㄴ-10 / 마태17,1-9>
고인 물은 탁해지고 마침내 썩기 마련입니다. 또, 환기하지 않고 며칠 문을 꼭꼭 닫아두면 퀴퀴한 냄새가 나지요. 비단 물이나 공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도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야 생각이 탁해지지 않고, 가끔 산책이라도 해야 마음이 상쾌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우리는 한곳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떠남을 반복하는 순례자로 창조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전해줍니다.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소수의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르셨고, 이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하지요. 많은 영성가들은 여기 등장하는 모세와 엘리야를 모세오경과 예언서, 곧 구약성경의 상징으로 묵상하곤 합니다. 그러니까, 신약의 하느님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구약의 하느님 말씀과 높은 산 위에 함께 자리하고 계셨던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주님께 초막을 지어드리겠다는 베드로의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높은 산 위에 자리 잡은 거룩한 성전에 모셔두고 싶다는 의미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여 거룩함에 세속의 때라도 묻을세라, 더러운 것들과 분리하여 고이 보존하고 싶은 마음이었겠지요.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고인 물처럼 한곳에 머물러만 있지 않습니다. 작은 씨앗을 땅속 깊이 넣고 발로 밟아도 기어이 싹을 틔우고 마는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어느 한 곳에 가둬둘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말씀은 산 위의 거룩한 초막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말씀을 품고 사는 이들의 말과 행동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따뜻한 마음을 통해서 온 세상 구석구석 선포되어야 합니다.
박노해 시인이 쓴 시 가운데, 참사랑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영감을 주는, ‘얼룩진 사랑’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노래하는 그 사람의 옷이 얼룩져 있다
사랑은 늘 얼룩을 닦아 내는 것
가난의 먼지와 절은 때와
거리와 골목의 얼룩을 닦아 내는 것
고결하고 아름다운 것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허리 숙여 상처와 눈물을 닦아 내는 것
그리하여 사랑은 점점 닳아 있고
조금은 지쳐 있고 늘 얼룩져 있는 것
하느님의 말씀도, 그리고 그 말씀을 따르는 우리도 구름 덮인 높은 산 위에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에게 사랑을 다그친다면, 먼지와 때 타는 것이 두려워 세상과 분리되어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산을 내려가는 마음, 기꺼이 얼룩진 사랑을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통해서 보다 거룩한 생명력으로 세상에 선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코로나19’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조되는 요즘입니다. 모임을 자제하고 또 물리적인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거리두기의 의미가, 각 개인이 섬처럼 고립되어야 한다거나, 높은 산 위에 머물러야 한다는 그런 뜻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온 국민이 의사와 간호사처럼 환자들을 돌보거나 자원봉사를 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지요. 반면, 높은 산에서 아래로 물이 흘러 내려오듯이, 연민의 강이 구석구석으로 흐르도록 할 수는 있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면서 많은 이들이 떠남에 대해 묵상을 합니다. 습관이 되어 고착된 유형무형의 장소로부터의 떠남, 집착하는 어떤 대상으로부터의 떠남, 그리고 과거의 나로부터의 떠남 등을 깊이 묵상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떠남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그 자체로 고정해 두려는 완고함으로부터의 떠남입니다. 아마도 이 떠남을 통해서, 해처럼 빛나던 하얀 옷은 빛을 잃고, 우리를 신비롭게 덮었던 구름도 걷히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얼룩진 사랑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말씀이 산을 내려갈 때, 그 말씀이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신비는 구름 속에 머물며 사람들과 분리된 거룩함의 신비가 아니라, 개방과 연대를 통해 연민을 나누는 친교의 신비였습니다. 그 신비를 우리 각자의 삶으로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분의 제자들이 될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을 함께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
<창세12,1-4ㄱ / 2티모1,8ㄴ-10 / 마태17,1-9>
고인 물은 탁해지고 마침내 썩기 마련입니다. 또, 환기하지 않고 며칠 문을 꼭꼭 닫아두면 퀴퀴한 냄새가 나지요. 비단 물이나 공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도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야 생각이 탁해지지 않고, 가끔 산책이라도 해야 마음이 상쾌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우리는 한곳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떠남을 반복하는 순례자로 창조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주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전해줍니다.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소수의 제자들과 함께 높은 산에 오르셨고, 이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하지요. 많은 영성가들은 여기 등장하는 모세와 엘리야를 모세오경과 예언서, 곧 구약성경의 상징으로 묵상하곤 합니다. 그러니까, 신약의 하느님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구약의 하느님 말씀과 높은 산 위에 함께 자리하고 계셨던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주님께 초막을 지어드리겠다는 베드로의 말은, 하느님의 말씀을 높은 산 위에 자리 잡은 거룩한 성전에 모셔두고 싶다는 의미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여 거룩함에 세속의 때라도 묻을세라, 더러운 것들과 분리하여 고이 보존하고 싶은 마음이었겠지요.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고인 물처럼 한곳에 머물러만 있지 않습니다. 작은 씨앗을 땅속 깊이 넣고 발로 밟아도 기어이 싹을 틔우고 마는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어느 한 곳에 가둬둘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말씀은 산 위의 거룩한 초막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말씀을 품고 사는 이들의 말과 행동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따뜻한 마음을 통해서 온 세상 구석구석 선포되어야 합니다.
박노해 시인이 쓴 시 가운데, 참사랑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영감을 주는, ‘얼룩진 사랑’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노래하는 그 사람의 옷이 얼룩져 있다
사랑은 늘 얼룩을 닦아 내는 것
가난의 먼지와 절은 때와
거리와 골목의 얼룩을 닦아 내는 것
고결하고 아름다운 것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허리 숙여 상처와 눈물을 닦아 내는 것
그리하여 사랑은 점점 닳아 있고
조금은 지쳐 있고 늘 얼룩져 있는 것
하느님의 말씀도, 그리고 그 말씀을 따르는 우리도 구름 덮인 높은 산 위에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에게 사랑을 다그친다면, 먼지와 때 타는 것이 두려워 세상과 분리되어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산을 내려가는 마음, 기꺼이 얼룩진 사랑을 소명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통해서 보다 거룩한 생명력으로 세상에 선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코로나19’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조되는 요즘입니다. 모임을 자제하고 또 물리적인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거리두기의 의미가, 각 개인이 섬처럼 고립되어야 한다거나, 높은 산 위에 머물러야 한다는 그런 뜻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고 온 국민이 의사와 간호사처럼 환자들을 돌보거나 자원봉사를 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지요. 반면, 높은 산에서 아래로 물이 흘러 내려오듯이, 연민의 강이 구석구석으로 흐르도록 할 수는 있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그러했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면서 많은 이들이 떠남에 대해 묵상을 합니다. 습관이 되어 고착된 유형무형의 장소로부터의 떠남, 집착하는 어떤 대상으로부터의 떠남, 그리고 과거의 나로부터의 떠남 등을 깊이 묵상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떠남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그 자체로 고정해 두려는 완고함으로부터의 떠남입니다. 아마도 이 떠남을 통해서, 해처럼 빛나던 하얀 옷은 빛을 잃고, 우리를 신비롭게 덮었던 구름도 걷히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얼룩진 사랑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말씀이 산을 내려갈 때, 그 말씀이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신비는 구름 속에 머물며 사람들과 분리된 거룩함의 신비가 아니라, 개방과 연대를 통해 연민을 나누는 친교의 신비였습니다. 그 신비를 우리 각자의 삶으로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분의 제자들이 될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을 함께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