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사무4,1ㄴ-11 / 마르1,40-45>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쟁에서 불리해지자 이스라엘은 주님의 계약 궤를 모셔 와 전쟁에서 승리하고자 합니다. 인간적으로 불리했던 상황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해주시기만 한다면 승리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졌을 뿐만 아니라, 모셔 온 계약 궤마저 빼앗기고 맙니다. 얼핏 보면 그들의 믿음이 소용없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패배한 진짜 원인은, 내적인 마음가짐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외적 형식만으로 하느님의 능력을 이용할 수 있으리라 여긴 교만이었습니다. 마치 동전을 넣으면 커피가 나오는 자판기처럼, 그들은 정해진 형식과 절차대로만 하면 언제든 하느님의 은총을 기계적으로 얻을 수 있다고 이해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은 그런 외적 형식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적인 마음을 어떻게 준비하느냐가 더 중요하지요. 특별히 오늘 제1독서에서 계약의 궤와 함께 온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가 어떤 이들인지 눈여겨보면 이는 더욱 명확해집니다. 사무엘기 상권 2장에 따르면, 엘리의 두 아들들은 “불량한 자들로서 주님을 알아 모시지 않았고, 백성과 관련된 사제들의 규정도 무시하였다”(1사무2,12-13)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깨끗한 마음이나 깊은 신심과는 거리가 먼 이들이, 형식과 절차에 따라 계약의 궤를 모시고 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을 보시는 주님(1사무16,7)께로부터 그들이 원하는 복을 받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나병 환자의 치유 이야기를 봅니다. 많은 영성가들은 이 이야기를 단지 외적인 질병의 치유를 넘어 전인적 차원의 치유로 묵상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나병이라는 육체적 질병만을 없애시려 했다면, 아마 말씀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을 품고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손을 대시지요. 부정한 사람, 그리고 죄인이라고 낙인찍혀서 그 누구도 가까이하지 않으려 했던 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사람의 따뜻한 온기를 전하셨던 것입니다. 외적 질병보다도 오히려 내적인 아픔에 마음을 기울이시고, 그 아픔을 어루만져 주셨던 것이지요. 이렇게 주님께서는 다시 겉모습을 넘어 내면을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이스라엘에게는 전쟁을 뒤집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원로들이 이렇게 이야기를 했었지요. “주님께서 어찌하여 오늘 필리스티아인들 앞에서 우리를 치셨을까?”(1사무4,3) 만일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외적인 형식이 아닌, 마음의 회개에서 찾았더라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오늘 제1독서와 많이 달라졌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어떤 문제를 발견했을 때, 거기에 어떻게 답하는지에 따라 각 개인의 역사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대답이 주님께서 바라보시는 시선과 맞닿아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은총을 함께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
<1사무4,1ㄴ-11 / 마르1,40-45>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쟁에서 불리해지자 이스라엘은 주님의 계약 궤를 모셔 와 전쟁에서 승리하고자 합니다. 인간적으로 불리했던 상황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해주시기만 한다면 승리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졌을 뿐만 아니라, 모셔 온 계약 궤마저 빼앗기고 맙니다. 얼핏 보면 그들의 믿음이 소용없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패배한 진짜 원인은, 내적인 마음가짐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외적 형식만으로 하느님의 능력을 이용할 수 있으리라 여긴 교만이었습니다. 마치 동전을 넣으면 커피가 나오는 자판기처럼, 그들은 정해진 형식과 절차대로만 하면 언제든 하느님의 은총을 기계적으로 얻을 수 있다고 이해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은 그런 외적 형식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적인 마음을 어떻게 준비하느냐가 더 중요하지요. 특별히 오늘 제1독서에서 계약의 궤와 함께 온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가 어떤 이들인지 눈여겨보면 이는 더욱 명확해집니다. 사무엘기 상권 2장에 따르면, 엘리의 두 아들들은 “불량한 자들로서 주님을 알아 모시지 않았고, 백성과 관련된 사제들의 규정도 무시하였다”(1사무2,12-13)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깨끗한 마음이나 깊은 신심과는 거리가 먼 이들이, 형식과 절차에 따라 계약의 궤를 모시고 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을 보시는 주님(1사무16,7)께로부터 그들이 원하는 복을 받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나병 환자의 치유 이야기를 봅니다. 많은 영성가들은 이 이야기를 단지 외적인 질병의 치유를 넘어 전인적 차원의 치유로 묵상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나병이라는 육체적 질병만을 없애시려 했다면, 아마 말씀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을 품고 손을 내밀어 그의 몸에 손을 대시지요. 부정한 사람, 그리고 죄인이라고 낙인찍혀서 그 누구도 가까이하지 않으려 했던 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사람의 따뜻한 온기를 전하셨던 것입니다. 외적 질병보다도 오히려 내적인 아픔에 마음을 기울이시고, 그 아픔을 어루만져 주셨던 것이지요. 이렇게 주님께서는 다시 겉모습을 넘어 내면을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이스라엘에게는 전쟁을 뒤집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원로들이 이렇게 이야기를 했었지요. “주님께서 어찌하여 오늘 필리스티아인들 앞에서 우리를 치셨을까?”(1사무4,3) 만일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외적인 형식이 아닌, 마음의 회개에서 찾았더라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오늘 제1독서와 많이 달라졌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어떤 문제를 발견했을 때, 거기에 어떻게 답하는지에 따라 각 개인의 역사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대답이 주님께서 바라보시는 시선과 맞닿아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은총을 함께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