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55,1-3 / 로마8,35.37-39 / 마태14,13-21>
예전에 휴가를 가면 어머니께서 엄청나게 많은 음식을 준비해서 끝도 없이 제 앞에 놓으시던 기억이 납니다. 개인적으로 한 번에 많이 먹는 것을 힘들어하기도 해서, 결국 준비하신 것에 반도 먹지 못하고 배가 불러 더이상 먹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요. 그래서 매번 식사의 마지막은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준비하셨냐는 어머니께 대한 제 핀잔과 타박으로 끝나곤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 풍요로움의 기억이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듯 풍요로움을 느끼게 했던 정체는 제 배를 부르게 했던 음식이 아니라, 뭐라도 더 먹이고 싶어하시던 어머니의 마음, 사랑이었음도 이제는 잘 알고 있지요.
지난주 화요일, 하나밖에 없는 조카가 군입대를 했습니다. 그리고 입영 바로 전 부대 근처에서 형 내외와 저, 그리고 조카가 함께 마지막 식사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예전 제 어머니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그 식사 시간동안 형수님이 조카에게 많이 먹으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던 것이지요. 어쩌면 조카는 그 순간 귀찮게 느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제가 그랬던 것처럼, 그날의 풍요로움을 기억하면서, 그것이 음식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가능했던 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주고 또 주고, 넘치도록 주어도 여전히 부족함을 느껴서 다시 또 주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마음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목마르고 배고픈 사람들을 아무런 대가 없이 배불리 먹이시는 제1독서의 하느님 모습을 보아도 그렇고,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한참 남을 만큼 풍성하게 빵과 물고기를 먹게 하시는 복음의 예수님 모습을 보아도 그러니 말입니다.
비단 이런 사랑의 모습을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만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카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을 때, 그 양은 카나의 모든 주민들이 충분히 마시고도 남는 엄청난 양이었다고 하지요. 또, 예수님께서 고기를 잡지 못하던 제자들에게 그물 칠 곳을 알려주시자, 배가 뒤집어질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다고도 합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어찌보면 낭비하는 것처럼 보일만큼 너무 많이 주십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작은 겨자씨가 어떤 나무보다도 커져서 새들이 깃들일만큼 성장할 것이라는 비유나(마태13,31-32), 오늘날 화폐가치로는 2조 원이 넘는 만 탈렌트를 탕감해주는 임금의 비유(마태18,23-27)를 보노라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풍요롭게 주고 싶어 하시는지, 그분의 충만함이 얼마나 헤아릴 수 없는 것인지 조금은 상상해볼 수 있게 되는 것도 같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오셨고(요한10,10), 그렇게 넘치는 충만함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우리가 체험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감지하기 시작한 이들은 이제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했던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8-39)
한편, 이렇듯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고 고백하게 된 이들은, 차고 넘치는 그 사랑을 이제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자세히 읽다 보면 눈여겨보게 되는 상반된 두 가지 말씀이 있습니다. 우선, 제1독서에 등장하는 구약의 하느님께서는 “와서 먹어라”(이사55,1)라고 하시며 당신이 직접 베푸는 분이심을 강조하시지만, 복음에 등장하는 신약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주어라”(마태14,16)라는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이 수혜자를 넘어 베푸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고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이 변화는 제2독서에 등장하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기점으로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두 개 독서와 복음 말씀은 하느님의 충만한 사랑을 체험한 이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사랑을 다른 이들과 나누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준다고 묵상할 수 있겠습니다.
이 과정이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모되는 과정입니다. 무조건적으로 차고 넘치도록 주어지는 하느님 사랑을 의식하고 감사하는 것이 언제나 첫 번째이지요. 거저 받은 생명, 선물로 주어진 신앙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주변의 이웃과 환경들 모두가 “와서 먹어라”라고 하시는 그분께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풍요로운 사랑에 감사하며 두려움 없이 그분과 하나 되기로 결심하는 것이 두 번째 단계입니다. 바로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는 때이지요. 그리고서 마침내 그분 마음과 결합되어 기꺼이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세 번째 단계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렇게 점차 가는 곳마다 사랑을 전하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모두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은 이 큰 사랑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이 초대에 겸손하면서도 담대하게 응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우리 각자가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그분의 풍요로움과 충만함을 모든 이들과 나눌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며, 이 시간 필요한 은총을 함께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
<이사55,1-3 / 로마8,35.37-39 / 마태14,13-21>
예전에 휴가를 가면 어머니께서 엄청나게 많은 음식을 준비해서 끝도 없이 제 앞에 놓으시던 기억이 납니다. 개인적으로 한 번에 많이 먹는 것을 힘들어하기도 해서, 결국 준비하신 것에 반도 먹지 못하고 배가 불러 더이상 먹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요. 그래서 매번 식사의 마지막은 왜 이렇게 음식을 많이 준비하셨냐는 어머니께 대한 제 핀잔과 타박으로 끝나곤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 풍요로움의 기억이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듯 풍요로움을 느끼게 했던 정체는 제 배를 부르게 했던 음식이 아니라, 뭐라도 더 먹이고 싶어하시던 어머니의 마음, 사랑이었음도 이제는 잘 알고 있지요.
지난주 화요일, 하나밖에 없는 조카가 군입대를 했습니다. 그리고 입영 바로 전 부대 근처에서 형 내외와 저, 그리고 조카가 함께 마지막 식사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예전 제 어머니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그 식사 시간동안 형수님이 조카에게 많이 먹으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던 것이지요. 어쩌면 조카는 그 순간 귀찮게 느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제가 그랬던 것처럼, 그날의 풍요로움을 기억하면서, 그것이 음식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가능했던 것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주고 또 주고, 넘치도록 주어도 여전히 부족함을 느껴서 다시 또 주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마음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고 여겨집니다. 목마르고 배고픈 사람들을 아무런 대가 없이 배불리 먹이시는 제1독서의 하느님 모습을 보아도 그렇고,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한참 남을 만큼 풍성하게 빵과 물고기를 먹게 하시는 복음의 예수님 모습을 보아도 그러니 말입니다.
비단 이런 사랑의 모습을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만 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카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을 때, 그 양은 카나의 모든 주민들이 충분히 마시고도 남는 엄청난 양이었다고 하지요. 또, 예수님께서 고기를 잡지 못하던 제자들에게 그물 칠 곳을 알려주시자, 배가 뒤집어질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다고도 합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어찌보면 낭비하는 것처럼 보일만큼 너무 많이 주십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작은 겨자씨가 어떤 나무보다도 커져서 새들이 깃들일만큼 성장할 것이라는 비유나(마태13,31-32), 오늘날 화폐가치로는 2조 원이 넘는 만 탈렌트를 탕감해주는 임금의 비유(마태18,23-27)를 보노라면, 예수님께서 얼마나 풍요롭게 주고 싶어 하시는지, 그분의 충만함이 얼마나 헤아릴 수 없는 것인지 조금은 상상해볼 수 있게 되는 것도 같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오셨고(요한10,10), 그렇게 넘치는 충만함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우리가 체험할 수 있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감지하기 시작한 이들은 이제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했던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8-39)
한편, 이렇듯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고 고백하게 된 이들은, 차고 넘치는 그 사랑을 이제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자세히 읽다 보면 눈여겨보게 되는 상반된 두 가지 말씀이 있습니다. 우선, 제1독서에 등장하는 구약의 하느님께서는 “와서 먹어라”(이사55,1)라고 하시며 당신이 직접 베푸는 분이심을 강조하시지만, 복음에 등장하는 신약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주어라”(마태14,16)라는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이 수혜자를 넘어 베푸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고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이 변화는 제2독서에 등장하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기점으로 이루어진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두 개 독서와 복음 말씀은 하느님의 충만한 사랑을 체험한 이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사랑을 다른 이들과 나누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준다고 묵상할 수 있겠습니다.
이 과정이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모되는 과정입니다. 무조건적으로 차고 넘치도록 주어지는 하느님 사랑을 의식하고 감사하는 것이 언제나 첫 번째이지요. 거저 받은 생명, 선물로 주어진 신앙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주변의 이웃과 환경들 모두가 “와서 먹어라”라고 하시는 그분께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풍요로운 사랑에 감사하며 두려움 없이 그분과 하나 되기로 결심하는 것이 두 번째 단계입니다. 바로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는 때이지요. 그리고서 마침내 그분 마음과 결합되어 기꺼이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세 번째 단계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렇게 점차 가는 곳마다 사랑을 전하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모두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은 이 큰 사랑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이 초대에 겸손하면서도 담대하게 응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우리 각자가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그분의 풍요로움과 충만함을 모든 이들과 나눌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하며, 이 시간 필요한 은총을 함께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