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6,1-4.6-8 / 마태12,38-42>
건강이나 미용을 생각해서 다이어트에 관심을 갖는 분들이 정말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분들을 겨냥해서 다양한 제품이 나오기도 하지요. 평소대로 식사하고 나서 먹으면 밥을 굶은 효과가 난다는 약도 있고, 살이 빠지기를 원하는 부위에 부착하고 스위치를 누르면 미세한 떨림이 일어나 운동 효과를 내는 장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예 지방 흡입술 같은 방법을 통해 단번에 살을 빼는 방법도 있지요. 그런데 정작 전문가들은 건강한 다이어트를 위해서는, 그 어떤 것보다도 운동과 식단조절이 필수라고 한결같이 이야기합니다. 그럼에도 다양한 다이어트 방법이 이렇게나 많은 것은, 번거롭고 어려운 길보다 상대적으로 내가 해봄직하고 수월해 보이는 방법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에서도 이러한 심리의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미카 예언자를 통해서 당신이 원하는 것은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당신과 함께 걷는 것이라고 재차 말씀하셨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떤 번제물을 얼마나 바쳐야 하는지, 자기 맏아들을 내어놓아야 하는지를 고민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내적으로 변화되기를 바라셨는데, 정작 이들은 수천 마리의 숫양을 바치는 외적인 방법을 더 수월하게 여겼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하느님의 방법이 아닌 자신의 방법을 고집하고, 심지어 하느님께 그것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복음에 등장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눈먼 이의 눈을 뜨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를 말하게 하셨으며, 마귀를 쫓아내시는 등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표징을 또 보여달라고 하는 걸 보니, 그 기적이 그들이 원하는 표징은 아니었던가 봅니다. 아마도 죄인이나 가난한 이들에게 일어난 기적이 아니라, 자신들처럼 경건하고 열심한 유다인들에게 보상처럼 주어지는 표징을 기다렸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 결과, 이들 역시 하느님의 방식이 아닌 자신들의 방식을 완고하게 고집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방식을 하느님께 강요하기에 이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머뭇거릴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이어트 방법도 그렇거니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를 구할 때도, 좀 더 수월한 방법을 찾으려고 이미 알고 있는 답을 모른 척할 때가 있다는 것이지요. 이는 한편으로 어려움을 피하고 싶어하는 나약함의 표현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바라는 방식으로의 구원을 꿈꾸는 교만함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의 받아들임과, 솔로몬의 지혜를 청해 들었던 남방 여왕의 겸손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미카 예언자가 명확히 이야기하듯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외적인 봉헌물이 아니라, 우리가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당신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이를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을 함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아멘.
<미카6,1-4.6-8 / 마태12,38-42>
건강이나 미용을 생각해서 다이어트에 관심을 갖는 분들이 정말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분들을 겨냥해서 다양한 제품이 나오기도 하지요. 평소대로 식사하고 나서 먹으면 밥을 굶은 효과가 난다는 약도 있고, 살이 빠지기를 원하는 부위에 부착하고 스위치를 누르면 미세한 떨림이 일어나 운동 효과를 내는 장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예 지방 흡입술 같은 방법을 통해 단번에 살을 빼는 방법도 있지요. 그런데 정작 전문가들은 건강한 다이어트를 위해서는, 그 어떤 것보다도 운동과 식단조절이 필수라고 한결같이 이야기합니다. 그럼에도 다양한 다이어트 방법이 이렇게나 많은 것은, 번거롭고 어려운 길보다 상대적으로 내가 해봄직하고 수월해 보이는 방법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에서도 이러한 심리의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미카 예언자를 통해서 당신이 원하는 것은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당신과 함께 걷는 것이라고 재차 말씀하셨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떤 번제물을 얼마나 바쳐야 하는지, 자기 맏아들을 내어놓아야 하는지를 고민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내적으로 변화되기를 바라셨는데, 정작 이들은 수천 마리의 숫양을 바치는 외적인 방법을 더 수월하게 여겼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하느님의 방법이 아닌 자신의 방법을 고집하고, 심지어 하느님께 그것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복음에 등장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눈먼 이의 눈을 뜨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를 말하게 하셨으며, 마귀를 쫓아내시는 등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표징을 또 보여달라고 하는 걸 보니, 그 기적이 그들이 원하는 표징은 아니었던가 봅니다. 아마도 죄인이나 가난한 이들에게 일어난 기적이 아니라, 자신들처럼 경건하고 열심한 유다인들에게 보상처럼 주어지는 표징을 기다렸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 결과, 이들 역시 하느님의 방식이 아닌 자신들의 방식을 완고하게 고집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방식을 하느님께 강요하기에 이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도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머뭇거릴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이어트 방법도 그렇거니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를 구할 때도, 좀 더 수월한 방법을 찾으려고 이미 알고 있는 답을 모른 척할 때가 있다는 것이지요. 이는 한편으로 어려움을 피하고 싶어하는 나약함의 표현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바라는 방식으로의 구원을 꿈꾸는 교만함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의 받아들임과, 솔로몬의 지혜를 청해 들었던 남방 여왕의 겸손을 말씀하십니다.
오늘 미카 예언자가 명확히 이야기하듯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외적인 봉헌물이 아니라, 우리가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당신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이를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을 함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