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1,10-17 / 마태10,34─11,1>
언젠가 가톨릭 신자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설문조사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에 따르면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그 첫 번째였다고 하지요. 이러한 바람은 사실 나쁜 것도 아니고, 오히려 혼란스러운 세상을 살면서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10,34)고 말씀하시지요. 그 결과,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말씀에 의아함을 느끼는 것도 같습니다.
이 말씀을 올바로 알아듣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평화가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평화는 전쟁과 분쟁, 혹은 갈등과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흔히들 생각하지요. 일면 맞는 말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렇듯 어떤 것이 없는 상태로 평화를 수동적으로 정의하면, 그 참된 의미를 축소해버릴 수 있습니다. 사실, 이사야 예언자가 이야기하듯, 평화는 본래 정의가 자리잡혔을 때 맺혀지는 열매입니다.(이사32,17) 무엇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만한 정의의 결과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오늘 복음 말씀도 갈등과 분쟁을 정당화하신 것이 아니라, 정의가 세워지기 위한 길을 제시해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정의는 무엇보다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바가 실현되는 질서라고 할 수 있지요. 예컨대 집안 식구가 서로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고 하더라도,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사랑하는 질서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갈 때 비로소 부활하게 되는 파스카의 신비 역시 마땅히 실현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의 정의는 자비로 완성되지요. 사실, 물 한잔의 나눔에 담겨 있는 관심과 배려는 다름 아닌 자비의 정신입니다. 이렇게 오늘 말씀은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질서, 곧 정의를 되새기게 해주는 것이지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든다고 할 때, 단순히 잘못한 이를 벌하는 것이 정의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정의는 이를 뛰어넘습니다. 피조물에 앞서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질서’, 십자가를 통해 부활에 이르게 되는 ‘파스카의 질서’, 그리고 관심과 배려를 통해 서로를 돌보는 ‘연민의 질서’가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질서를 통해 정의가 완성될 때, 그제야 우리는 그 열매인 참 평화를 맛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 없는 상태로서의 평화가 아니라, 정의의 충만함으로서의 평화를 우리가 갈망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정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을 함께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
<이사1,10-17 / 마태10,34─11,1>
언젠가 가톨릭 신자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설문조사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에 따르면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그 첫 번째였다고 하지요. 이러한 바람은 사실 나쁜 것도 아니고, 오히려 혼란스러운 세상을 살면서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10,34)고 말씀하시지요. 그 결과,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말씀에 의아함을 느끼는 것도 같습니다.
이 말씀을 올바로 알아듣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평화가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평화는 전쟁과 분쟁, 혹은 갈등과 고통이 없는 상태라고 흔히들 생각하지요. 일면 맞는 말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렇듯 어떤 것이 없는 상태로 평화를 수동적으로 정의하면, 그 참된 의미를 축소해버릴 수 있습니다. 사실, 이사야 예언자가 이야기하듯, 평화는 본래 정의가 자리잡혔을 때 맺혀지는 열매입니다.(이사32,17) 무엇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만한 정의의 결과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오늘 복음 말씀도 갈등과 분쟁을 정당화하신 것이 아니라, 정의가 세워지기 위한 길을 제시해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정의는 무엇보다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바가 실현되는 질서라고 할 수 있지요. 예컨대 집안 식구가 서로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고 하더라도,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사랑하는 질서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갈 때 비로소 부활하게 되는 파스카의 신비 역시 마땅히 실현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의 정의는 자비로 완성되지요. 사실, 물 한잔의 나눔에 담겨 있는 관심과 배려는 다름 아닌 자비의 정신입니다. 이렇게 오늘 말씀은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질서, 곧 정의를 되새기게 해주는 것이지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든다고 할 때, 단순히 잘못한 이를 벌하는 것이 정의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정의는 이를 뛰어넘습니다. 피조물에 앞서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질서’, 십자가를 통해 부활에 이르게 되는 ‘파스카의 질서’, 그리고 관심과 배려를 통해 서로를 돌보는 ‘연민의 질서’가 완성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질서를 통해 정의가 완성될 때, 그제야 우리는 그 열매인 참 평화를 맛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 없는 상태로서의 평화가 아니라, 정의의 충만함으로서의 평화를 우리가 갈망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정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을 함께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