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열왕19,9ㄱ.11-13ㄱ / 로마9,1-5 / 마태14,22-3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먼저 배에 태워 건너편으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모였던 군중을 돌려보내시고, 또 산에 올라가 따로 기도하기도 하시지요. 그런데 이렇듯 스승에 앞서 먼저 간 제자들에게 문제가 생깁니다. 갈릴래아 호수를 가로지르던 제자들의 배가 큰 파도를 만나 시달리게 된 것입니다. 그 순간 제자들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자신들을 먼저 배에 태워 보내신 예수님께서 이 큰 파도를 미리 알지 못하셨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정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어려움을 겪을 줄 미리 아셨을까요? 만일 그렇다면 이를 아시면서도 굳이 제자들에게 그 어려움을 겪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비단 이러한 질문이 그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도 이와 비슷한 의문을 종종 갖게 되곤 하지요. 갑작스레 건강을 잃거나, 예상치 못한 일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을 때, 또 말도 안 되는 오해 때문에 억울해서 속이 터질 때. 그렇게 감당하기 힘든 큰일을 겪을 때면,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될 줄 아셨을까? 아셨다면 왜 이렇게 허락하신 걸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고통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 같은 하느님이 원망스럽고 야속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복음을 찬찬히 읽어가다 보면, 그렇게 제자들이 어려움을 겪게 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배를 타기 바로 전 오천 명도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위대한 스승을 모신 제자들이라는 사실에 의기양양했을 것도 같고, 또 그런 예수님께 언제까지고 충실할 거라 자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맞바람과 거센 파도로 이들의 자신감은 완전히 무너져버립니다. 심지어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던 스승 예수님의 모습조차 유령으로 잘못 알아볼 지경에 이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4,27)라고 이야기하시지만, 여전히 베드로는 그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주님이시거든, 저더로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14,28) 베드로의 이 말을 곰곰이 묵상해보면, 이것이 믿음에서 나온 말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이 말의 진짜 의미는 다음과 같았을 것입니다. “당신이 ‘나다’라고 말씀하시긴 하지만 여전히 믿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니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만일 제가 당신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믿을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얼마 전 예수님의 큰 기적을 보고 믿음에 불타던 베드로가, 시련과 어려움을 마주하게 되자 주님과 흥정을 시작한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우리도 이럴 때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컨대, “주님, 정말 당신이 계신다면, 이번에 제 아이가 대학에 합격하게 해 주십시오.”라거나, “주님, 정말 당신이 주님이시라면, 이번 사업만큼은 꼭 성공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마음으로 바라는 바를 솔직하게 기도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좋은 일입니다. 단지, 내 바람이 이루어질 때만 믿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협박해서 내 의도대로 그분 능력을 끌어내겠다는 교만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대가를 요구하는 신앙으로, 대개 초심자나 얕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많이 보게 되지요.
어쨌거나 베드로의 흥정은 처음에 성공한 듯 보입니다. 물 위를 몇 발자국 실제로 걸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물에 빠지고 말지요. 마치 얕은 신앙을 가진 이들이 큰 시련 앞에서 쉽게 신앙을 포기해버리는 것처럼, 베드로 역시 그렇게 무너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 절체절명의 순간이 역설적이게도 베드로에게는 은총의 순간이 됩니다. 드디어 베드로가 아무런 조건 없이 간절한 기도를 하게 된 것이지요.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마태14,30) 라고 말입니다.
그 솔직하고도 가난한 기도에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붙잡아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원을 체험한 제자들은 이제 전과는 다른 고백을 하기 시작합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태14,33)라고. 자신감을 가지고 흥정하듯 신앙을 말하던 이들이 시련과 고통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면서 깊은 신앙으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1서가 이야기하듯, 마치 불로 단련을 받아 순수한 금을 얻는 것처럼, 시련을 통해 그들 신앙이 순수한 믿음으로 정화된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복음 내용은 한편으로 우리의 신앙 여정을 압축해서 보여준다고도 여겨집니다. 자신감에 가득하였던 사람이 시련을 겪으면서 주님을 간절히 찾게 되고, 결국 그분을 하느님으로 고백하게 되는 여정 말입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의심도 하고 유혹에도 흔들리는, 그렇게 종종 물에 빠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마태14,30)라고 기도하며,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주님을 새롭게 체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우리 교회가 완전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죄인들의 공동체라고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것이겠지요.
누구나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겪을 때, 의심하고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오히려 구원의 손길을 체험하고, 예수님께서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더 깊이 믿게 되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이를 위해서 모든 어려움의 순간마다, 그저 겸손하고도 단순한 마음으로 주님께 도와달라고, 또 손을 잡아달라고 청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늘 함께 계시는 주님을 의식하고, 우리 눈이 항상 그분께 향해 있을 수 있도록 이 시간 필요한 은총을 함께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
<1열왕19,9ㄱ.11-13ㄱ / 로마9,1-5 / 마태14,22-33>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먼저 배에 태워 건너편으로 보내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모였던 군중을 돌려보내시고, 또 산에 올라가 따로 기도하기도 하시지요. 그런데 이렇듯 스승에 앞서 먼저 간 제자들에게 문제가 생깁니다. 갈릴래아 호수를 가로지르던 제자들의 배가 큰 파도를 만나 시달리게 된 것입니다. 그 순간 제자들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자신들을 먼저 배에 태워 보내신 예수님께서 이 큰 파도를 미리 알지 못하셨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정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어려움을 겪을 줄 미리 아셨을까요? 만일 그렇다면 이를 아시면서도 굳이 제자들에게 그 어려움을 겪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비단 이러한 질문이 그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도 이와 비슷한 의문을 종종 갖게 되곤 하지요. 갑작스레 건강을 잃거나, 예상치 못한 일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을 때, 또 말도 안 되는 오해 때문에 억울해서 속이 터질 때. 그렇게 감당하기 힘든 큰일을 겪을 때면,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될 줄 아셨을까? 아셨다면 왜 이렇게 허락하신 걸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고통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 같은 하느님이 원망스럽고 야속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복음을 찬찬히 읽어가다 보면, 그렇게 제자들이 어려움을 겪게 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배를 타기 바로 전 오천 명도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아마도 위대한 스승을 모신 제자들이라는 사실에 의기양양했을 것도 같고, 또 그런 예수님께 언제까지고 충실할 거라 자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맞바람과 거센 파도로 이들의 자신감은 완전히 무너져버립니다. 심지어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던 스승 예수님의 모습조차 유령으로 잘못 알아볼 지경에 이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14,27)라고 이야기하시지만, 여전히 베드로는 그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기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주님이시거든, 저더로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14,28) 베드로의 이 말을 곰곰이 묵상해보면, 이것이 믿음에서 나온 말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이 말의 진짜 의미는 다음과 같았을 것입니다. “당신이 ‘나다’라고 말씀하시긴 하지만 여전히 믿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니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만일 제가 당신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믿을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얼마 전 예수님의 큰 기적을 보고 믿음에 불타던 베드로가, 시련과 어려움을 마주하게 되자 주님과 흥정을 시작한 것이지요. 그런데 사실, 우리도 이럴 때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컨대, “주님, 정말 당신이 계신다면, 이번에 제 아이가 대학에 합격하게 해 주십시오.”라거나, “주님, 정말 당신이 주님이시라면, 이번 사업만큼은 꼭 성공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마음으로 바라는 바를 솔직하게 기도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좋은 일입니다. 단지, 내 바람이 이루어질 때만 믿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협박해서 내 의도대로 그분 능력을 끌어내겠다는 교만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는 대가를 요구하는 신앙으로, 대개 초심자나 얕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많이 보게 되지요.
어쨌거나 베드로의 흥정은 처음에 성공한 듯 보입니다. 물 위를 몇 발자국 실제로 걸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물에 빠지고 말지요. 마치 얕은 신앙을 가진 이들이 큰 시련 앞에서 쉽게 신앙을 포기해버리는 것처럼, 베드로 역시 그렇게 무너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 절체절명의 순간이 역설적이게도 베드로에게는 은총의 순간이 됩니다. 드디어 베드로가 아무런 조건 없이 간절한 기도를 하게 된 것이지요.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마태14,30) 라고 말입니다.
그 솔직하고도 가난한 기도에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붙잡아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원을 체험한 제자들은 이제 전과는 다른 고백을 하기 시작합니다.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태14,33)라고. 자신감을 가지고 흥정하듯 신앙을 말하던 이들이 시련과 고통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면서 깊은 신앙으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1서가 이야기하듯, 마치 불로 단련을 받아 순수한 금을 얻는 것처럼, 시련을 통해 그들 신앙이 순수한 믿음으로 정화된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복음 내용은 한편으로 우리의 신앙 여정을 압축해서 보여준다고도 여겨집니다. 자신감에 가득하였던 사람이 시련을 겪으면서 주님을 간절히 찾게 되고, 결국 그분을 하느님으로 고백하게 되는 여정 말입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라, 베드로처럼 의심도 하고 유혹에도 흔들리는, 그렇게 종종 물에 빠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마태14,30)라고 기도하며,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주님을 새롭게 체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우리 교회가 완전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죄인들의 공동체라고 한결같이 이야기하는 것이겠지요.
누구나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겪을 때, 의심하고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이 오히려 구원의 손길을 체험하고, 예수님께서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더 깊이 믿게 되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이를 위해서 모든 어려움의 순간마다, 그저 겸손하고도 단순한 마음으로 주님께 도와달라고, 또 손을 잡아달라고 청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늘 함께 계시는 주님을 의식하고, 우리 눈이 항상 그분께 향해 있을 수 있도록 이 시간 필요한 은총을 함께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