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1,1-11 / 마르8,11-13>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4개 부문 수상을 하면서, 연일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회자됩니다. 이처럼 전 세계적인 열광을 이끌어낸 것은,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오늘날 사회 현실을 잘 표현하고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이 공감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생각지 못했던 이 시대의 문제들을 직시하게 해주고, 그 해결책을 고민하도록 이끌어주는 것 같습니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불편하게 보여주고, 올바른 길을 모색하도록 이끌어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느 모로 이 영화는, 비록 종교적인 언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시대의 표징’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를 보고 해석하는 바가 각자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화 ‘기생충’을 보고, 서로를 가르는 선을 넘어서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반면, 어떤 이들은 각자의 선을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같은 표징을 보고서도 이렇게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것을 보면서, 오늘날 표현으로 ‘답정남’, 혹은 ‘답정녀’처럼, 이미 답을 정해놓고 표징을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표징이라는 것은 목적지를 가리키는 이정표와 같습니다. 올바로 가고 있을 때는 위안을 주고, 잘못된 길로 갈 때는 불편하게 다그치면서 우리를 결국 목적지로 이끌어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무리 표징이 주어지더라도, 미리 답을 정해놓고 보고 싶은 대로만 보려 한다면, 그 표징이 지시하는 목적지로 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요구하는 표징을 거부하십니다. 복음에 따르면, 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표징을 요구했다고 하지요. 사실 오늘 복음 바로 이전에, 이미 예수님께서는 사천 명을 먹이신 표징을 보여주신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하려고 재차 표징을 요구한 것은 길을 찾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의심하고 다른 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의도로 보여집니다. 이래서는 그들에게 어떤 표징이 주어지더라도, 결국 그들이 정한 답에 따라 해석될 것이 뻔한 노릇이지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깊은 탄식을 하신 것도 무리가 아니었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수많은 표징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비단, 영화 ‘기생충’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의 기쁨과 슬픔, 분노와 고통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지요. 그 표징을 올바로 바라보기 위해서, 무엇보다 선입견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만일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의 깊은 탄식을 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특별히 오늘 하루, 내 주변의 표징들을 열린 마음으로 볼 수 있기를 기도하며, 이를 위해 필요한 은총을 함께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야고1,1-11 / 마르8,11-13>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4개 부문 수상을 하면서, 연일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회자됩니다. 이처럼 전 세계적인 열광을 이끌어낸 것은,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오늘날 사회 현실을 잘 표현하고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이 공감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생각지 못했던 이 시대의 문제들을 직시하게 해주고, 그 해결책을 고민하도록 이끌어주는 것 같습니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불편하게 보여주고, 올바른 길을 모색하도록 이끌어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느 모로 이 영화는, 비록 종교적인 언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시대의 표징’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보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를 보고 해석하는 바가 각자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화 ‘기생충’을 보고, 서로를 가르는 선을 넘어서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반면, 어떤 이들은 각자의 선을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같은 표징을 보고서도 이렇게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것을 보면서, 오늘날 표현으로 ‘답정남’, 혹은 ‘답정녀’처럼, 이미 답을 정해놓고 표징을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표징이라는 것은 목적지를 가리키는 이정표와 같습니다. 올바로 가고 있을 때는 위안을 주고, 잘못된 길로 갈 때는 불편하게 다그치면서 우리를 결국 목적지로 이끌어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무리 표징이 주어지더라도, 미리 답을 정해놓고 보고 싶은 대로만 보려 한다면, 그 표징이 지시하는 목적지로 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요구하는 표징을 거부하십니다. 복음에 따르면, 이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표징을 요구했다고 하지요. 사실 오늘 복음 바로 이전에, 이미 예수님께서는 사천 명을 먹이신 표징을 보여주신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하려고 재차 표징을 요구한 것은 길을 찾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의심하고 다른 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의도로 보여집니다. 이래서는 그들에게 어떤 표징이 주어지더라도, 결국 그들이 정한 답에 따라 해석될 것이 뻔한 노릇이지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깊은 탄식을 하신 것도 무리가 아니었겠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수많은 표징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비단, 영화 ‘기생충’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의 기쁨과 슬픔, 분노와 고통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지요. 그 표징을 올바로 바라보기 위해서, 무엇보다 선입견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만일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의 깊은 탄식을 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특별히 오늘 하루, 내 주변의 표징들을 열린 마음으로 볼 수 있기를 기도하며, 이를 위해 필요한 은총을 함께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