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15,15-20 / 1코린2,6-10 / 마태5,17-37>
공동체에서 재정을 맡고 있어서, 얼마 전 관련된 일 처리를 위해 관공서에 전화 문의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먼저 걸려온 전화가 많았었던지 3분가량 상담원 연결을 기다렸어야 했는데, 그 시간 동안 상담원을 향한 폭언과 욕설은 해당 법령에 따라 처벌될 수 있다는 안내가 나오더군요. 상담원에게 필요한 안내를 받으면 고마운 마음일 것 같은데, 또 설령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아쉬울 수야 있겠지만 굳이 폭언이나 욕설을 하고 싶을까 하는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언론을 통해 들은 바에 따르면, 많은 상담원들이 감정 노동에 내몰리고 있고, 또 많은 폭언과 욕설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담원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거친 말에 대한 고소 및 처벌을 가능케 한 법령 제정이 있었던 것이지요. 약자의 위치에 있는 이들을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감사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대했더라면 아무런 필요가 없었을 법이 만들어졌구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법이란 것이 그렇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고, 또 모두가 마음으로 원하고 행하는 것을 굳이 법으로 규정하지는 않지요. 예컨대, 부당한 이익을 취하지 못하게 막는 법은 있지만, 부당한 손해를 보면서 장사를 하면 안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게 장사하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으니, 관련 법도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이처럼 법이라는 것은,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기꺼이 행하지 못하는 것들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줍니다.
비단 오늘날 법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니지요.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 역시,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기꺼이 하지 못하고 있던 것들을 확인시켜 줍니다. 하느님 아닌 우상에게 자주 마음을 뺏기는 나약함, 내 안위를 위해 남을 이용하려는 비겁함, 또 진리가 아닌 거짓을 선택하는 위선. 십계명은 이렇듯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법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우리의 부족함을 깨닫게 해준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완성은 율법의 세부적인 내용을 보완하여, 어떤 경우에나 적용되는 완전한 법을 만들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능가하는 의로움을 말씀하시지요. 그것은 달리 말하면 마음의 변화입니다. 율법의 수많은 법 조항들을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어서, 마음으로 원하고 행동하게 되는 마음의 변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완성이란, 역설적이게도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세상의 완성, 그런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는 마음으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사실,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법 조항은, 우리 마음속에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가 일어날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만일 우리 마음이 그러한 증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된다면, 살인은 고사하고 형제에게 성을 내는 일도 없어지겠지요. 누군가에게 ‘바보’나 ‘멍청이’라고 욕을 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법 조항 역시, 우리 마음이 음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또 자기만족을 위해서 타인을 이용하고 싶을 때도 있음을 알기에 제정한 법인 것이지요. 만일 우리 마음이 깨끗해서, 모든 이들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그리고 내 형제자매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아마도 이런 법은 필요 없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고 돌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 되어, 마음으로 원하고 행동하게 될 테니 말입니다.
한 처음부터 하느님께서는 이런 마음들이 모여 만드는 세상을 바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꿈꾸고 선포하신 나라도, 이렇듯 법 없이도 사람들이 하느님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 세상, 그러니까 마음속에 사랑이 가득해서 그로부터 생각과 말과 행동이 자연스럽게 샘솟는 나라인 것이겠지요. 사실, 율법의 본래 목적도 살인을 피하거나, 형제를 일컬어 ‘바보’나 ‘멍청이’라고 비난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하고, 더 나아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이 사랑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일곱 번씩 일흔 번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이 참으로 자유로워진다면, 불가능해보이기만 했던 주님의 계명도 편한 멍에, 가벼운 짐이 되는 것이겠지요.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초대하시는 의로움이란 바로 이러한 의로움이라 여겨집니다.
제1독서에서 집회서 저자는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집회15,17)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마음이 늘 생명의 길을 바라고, 그 길을 따라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주님의 영 안에서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그렇게 우리 마음이 주님 마음을 닮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을 함께 청합시다. 아멘.
<집회15,15-20 / 1코린2,6-10 / 마태5,17-37>
공동체에서 재정을 맡고 있어서, 얼마 전 관련된 일 처리를 위해 관공서에 전화 문의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먼저 걸려온 전화가 많았었던지 3분가량 상담원 연결을 기다렸어야 했는데, 그 시간 동안 상담원을 향한 폭언과 욕설은 해당 법령에 따라 처벌될 수 있다는 안내가 나오더군요. 상담원에게 필요한 안내를 받으면 고마운 마음일 것 같은데, 또 설령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아쉬울 수야 있겠지만 굳이 폭언이나 욕설을 하고 싶을까 하는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언론을 통해 들은 바에 따르면, 많은 상담원들이 감정 노동에 내몰리고 있고, 또 많은 폭언과 욕설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담원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거친 말에 대한 고소 및 처벌을 가능케 한 법령 제정이 있었던 것이지요. 약자의 위치에 있는 이들을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감사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대했더라면 아무런 필요가 없었을 법이 만들어졌구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법이란 것이 그렇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고, 또 모두가 마음으로 원하고 행하는 것을 굳이 법으로 규정하지는 않지요. 예컨대, 부당한 이익을 취하지 못하게 막는 법은 있지만, 부당한 손해를 보면서 장사를 하면 안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게 장사하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으니, 관련 법도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이처럼 법이라는 것은,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기꺼이 행하지 못하는 것들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줍니다.
비단 오늘날 법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니지요.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십계명 역시,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기꺼이 하지 못하고 있던 것들을 확인시켜 줍니다. 하느님 아닌 우상에게 자주 마음을 뺏기는 나약함, 내 안위를 위해 남을 이용하려는 비겁함, 또 진리가 아닌 거짓을 선택하는 위선. 십계명은 이렇듯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법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우리의 부족함을 깨닫게 해준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완성은 율법의 세부적인 내용을 보완하여, 어떤 경우에나 적용되는 완전한 법을 만들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능가하는 의로움을 말씀하시지요. 그것은 달리 말하면 마음의 변화입니다. 율법의 수많은 법 조항들을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어서, 마음으로 원하고 행동하게 되는 마음의 변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완성이란, 역설적이게도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세상의 완성, 그런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는 마음으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사실,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법 조항은, 우리 마음속에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가 일어날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만일 우리 마음이 그러한 증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된다면, 살인은 고사하고 형제에게 성을 내는 일도 없어지겠지요. 누군가에게 ‘바보’나 ‘멍청이’라고 욕을 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법 조항 역시, 우리 마음이 음욕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또 자기만족을 위해서 타인을 이용하고 싶을 때도 있음을 알기에 제정한 법인 것이지요. 만일 우리 마음이 깨끗해서, 모든 이들을 하느님의 모상으로, 그리고 내 형제자매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아마도 이런 법은 필요 없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고 돌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 되어, 마음으로 원하고 행동하게 될 테니 말입니다.
한 처음부터 하느님께서는 이런 마음들이 모여 만드는 세상을 바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꿈꾸고 선포하신 나라도, 이렇듯 법 없이도 사람들이 하느님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 세상, 그러니까 마음속에 사랑이 가득해서 그로부터 생각과 말과 행동이 자연스럽게 샘솟는 나라인 것이겠지요. 사실, 율법의 본래 목적도 살인을 피하거나, 형제를 일컬어 ‘바보’나 ‘멍청이’라고 비난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하고, 더 나아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이 사랑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일곱 번씩 일흔 번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이 참으로 자유로워진다면, 불가능해보이기만 했던 주님의 계명도 편한 멍에, 가벼운 짐이 되는 것이겠지요.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초대하시는 의로움이란 바로 이러한 의로움이라 여겨집니다.
제1독서에서 집회서 저자는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집회15,17)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마음이 늘 생명의 길을 바라고, 그 길을 따라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주님의 영 안에서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그렇게 우리 마음이 주님 마음을 닮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을 함께 청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