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역대36,14-16.19-23 / 에페2,4-10 / 요한3,14-21>
모세의 인도를 받아 약속의 땅으로 가던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을 시작하자, 주님께서는 불 뱀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벌하셨습니다. 이에 백성들은 모세에게 간청을 하고, 다시 모세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여 치료법을 알게 됩니다. 바로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놓고, 뱀에 물린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게 한 것이지요. 그리고 과연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살았다고 합니다. (민수21,4-9)
만일 같은 원리가 모든 질병에 똑같이 적용된다면, 아마도 제일 먼저 코로나 바이러스 모형을 구리로 만들어 전국에 세우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요. 그런 마법같은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구리뱀을 통한 치유 사건 역시 단순히 뱀 모양을 만들어 달면 회복된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히려 당신의 이끄심을 신뢰하지 않고 불평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아주 작은 것부터 당신 말씀을 믿고 따름으로써 온전한 회복에 이르라는 하느님의 초대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치 구리뱀이 들어올려졌던 것처럼 당신도 들어 올려지셔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얼마 뒤 있을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과연 그 이후로 모든 인류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을 바라보며 회복되고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지요. 물론, 십자가 형상 자체에 엄청난 힘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사람을 낫게 하고 구원하는 것은, 이렇게 해서라도 모두를 구원하시려는 사랑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비롯될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쳐다 본 사람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믿는 사람"(요한3,15)이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겠지요. 사실, 생각해보면 십자가는 너무 많습니다. 누군가 서울을 '밤에 피어나는 공동묘지'라고 묘사한 바 있듯이, 수많은 십자가가 가는 곳마다 높이 매달려 있습니다. 만일 그 십자가 자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우리가 회복되고 구원되는 것이라면, 이 세상은 이미 완성된 하느님 나라가 되어 있겠지요. 하지만 질병과 고통, 미움과 폭력, 그리고 불의함이 존재하는 세상을 보노라면, 아직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결국, 오늘 복음은 마법같은 신앙이나 겉만 번지르르한 신앙이 아닌, 믿음과 사랑의 신앙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말씀으로 묵상하게 됩니다. 형식적으로 절차를 밟아가는 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그런 신앙 말이지요. 그러기에 이 말씀은 십자가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전례와 기도, 희생과 단식, 이웃을 위한 봉사 등에 있어서도, 마치 메뉴얼을 따라 하듯 기계적으로 하는 것에 대한 경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달리 늘 마음을 보신다고 하셨으니 말입니다.(1사무16,7)
특별히 오늘은 화이트데이이기도 하지요. 개인적으로 이런 날들을 많이 좋아하지는 않지만, 사탕을 주고받으며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참 즐겁습니다. 그 기쁨은 사탕이라는 매개 자체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거기에 담겨 있는 정성과 사랑 때문에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이겠지요. 생각해보면 모든 선물은 다 그 안에 담긴 마음과 의미 때문에 더욱 소중해지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구원, 그리고 거기에 응답하는 우리의 신앙도 수많은 매개를 통해 전해진다고 믿습니다. 그 매개 안에 담긴 보이지 않는 보물들을 잘 알아보고 기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우리 삶이 충만해질까 생각해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요한3,16) 그리고 십자가를 볼 때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이 말씀과 함께 하느님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만남이 우리를 해방시키고 구원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우리가 "하느님의 작품"(에페2,10)이 될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을 함께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

<2역대36,14-16.19-23 / 에페2,4-10 / 요한3,14-21>
모세의 인도를 받아 약속의 땅으로 가던 이스라엘 민족들이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을 시작하자, 주님께서는 불 뱀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벌하셨습니다. 이에 백성들은 모세에게 간청을 하고, 다시 모세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여 치료법을 알게 됩니다. 바로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놓고, 뱀에 물린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보게 한 것이지요. 그리고 과연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살았다고 합니다. (민수21,4-9)
만일 같은 원리가 모든 질병에 똑같이 적용된다면, 아마도 제일 먼저 코로나 바이러스 모형을 구리로 만들어 전국에 세우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요. 그런 마법같은 방법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구리뱀을 통한 치유 사건 역시 단순히 뱀 모양을 만들어 달면 회복된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히려 당신의 이끄심을 신뢰하지 않고 불평하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아주 작은 것부터 당신 말씀을 믿고 따름으로써 온전한 회복에 이르라는 하느님의 초대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치 구리뱀이 들어올려졌던 것처럼 당신도 들어 올려지셔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얼마 뒤 있을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과연 그 이후로 모든 인류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을 바라보며 회복되고 구원받을 수 있게 되었지요. 물론, 십자가 형상 자체에 엄청난 힘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사람을 낫게 하고 구원하는 것은, 이렇게 해서라도 모두를 구원하시려는 사랑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비롯될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쳐다 본 사람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믿는 사람"(요한3,15)이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겠지요. 사실, 생각해보면 십자가는 너무 많습니다. 누군가 서울을 '밤에 피어나는 공동묘지'라고 묘사한 바 있듯이, 수많은 십자가가 가는 곳마다 높이 매달려 있습니다. 만일 그 십자가 자체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우리가 회복되고 구원되는 것이라면, 이 세상은 이미 완성된 하느님 나라가 되어 있겠지요. 하지만 질병과 고통, 미움과 폭력, 그리고 불의함이 존재하는 세상을 보노라면, 아직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결국, 오늘 복음은 마법같은 신앙이나 겉만 번지르르한 신앙이 아닌, 믿음과 사랑의 신앙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말씀으로 묵상하게 됩니다. 형식적으로 절차를 밟아가는 식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그런 신앙 말이지요. 그러기에 이 말씀은 십자가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전례와 기도, 희생과 단식, 이웃을 위한 봉사 등에 있어서도, 마치 메뉴얼을 따라 하듯 기계적으로 하는 것에 대한 경계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달리 늘 마음을 보신다고 하셨으니 말입니다.(1사무16,7)
특별히 오늘은 화이트데이이기도 하지요. 개인적으로 이런 날들을 많이 좋아하지는 않지만, 사탕을 주고받으며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참 즐겁습니다. 그 기쁨은 사탕이라는 매개 자체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거기에 담겨 있는 정성과 사랑 때문에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이겠지요. 생각해보면 모든 선물은 다 그 안에 담긴 마음과 의미 때문에 더욱 소중해지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구원, 그리고 거기에 응답하는 우리의 신앙도 수많은 매개를 통해 전해진다고 믿습니다. 그 매개 안에 담긴 보이지 않는 보물들을 잘 알아보고 기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우리 삶이 충만해질까 생각해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요한3,16) 그리고 십자가를 볼 때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이 말씀과 함께 하느님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만남이 우리를 해방시키고 구원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우리가 "하느님의 작품"(에페2,10)이 될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을 함께 청하도록 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