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 2 독서 로마서 6,3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세례는 새로운 생명으로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죽음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닌 십자가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생기 있고, 윤기 있고 빛나기 때문에 갖고 싶고
한 번 잡으면 놓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욕심이 생깁니다.
자기 자신 안에서 살아있음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
또한 하느님께 그 은총을 구하기 위해 기도합니다.
물론 이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례 받은 그리스도교 신자이기에 우리 안에 있는 어둠,
즉 죽음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이 스치운다.”
우리가 잘 아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자신의 시 서시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쓰고 있습니다.
간혹 왜 그가 “살아있는 것을 사랑하겠다.”고 하지 않고,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다.”고 했는지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나와 우리 가족이 더 성공하고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한 것을 구하기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힘이 되고 희망이 되고 도움이 되는 은총을 구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가족들의 건강과 은총을 위해 기도하면서 돌보지 못한 것,
즉, 자기 자신의 아픈 시간들, 살아온 시간들 속에 담긴 땀과 수고로움들,
그 과정에서 겪었던 수많은 불안과 두려움을 위로하는 것 또한 필요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이고,
우리를 죽음을 넘어 새로운 삶으로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윤동주 시인에게 죽어가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리고 우리에게 있어 죽어가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먼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그러나 위로받지 못한 어둠과 슬픔과 두려움들입니다.
사람들은 어른이 된 어느 날부터 이제는 누군가를 위해 살아갑니다.
가족을 위해 살고, 성공을 위해, 더 빛나는 삶을 위해 자신을 가꾸며 삽니다.
그러면서 점점 자신의 어둠에 대해, 자신의 수고로움에 대해 위로하기 보다는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성공을 위해 기도하고, 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두려움과 부끄러움에 대해서는 그리고 자신의 아픔에 대해서는
잘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윤동주 시인이 서시에서 말하는 “죽어가는 것들”이겠죠.
여러분도 1주일에 한 번만큼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 기도하길 바랍니다.
매일 가족의 십자가만 지고 기도하지 말고,
매일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지고 위로하고 사랑하지 말고,
1주일에 한 번만큼은 지금까지 수고하며 살아온 자신을 위로하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지기에 앞서, 자신의 십자가를 안고 위로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 어떻게 했는데, 내가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는데,
내가 회사를 위해, 내가 친구를 위해, 내가 교회를 위해 어떻게 했는데 하며
살아있는 것만을 좇아 열심히 달리느라 돌보지 못하고 위로하지 못한
자신의 수고로움과 희생과 아픔과 고통들
그리고 가능하며 살며 하느님 앞에 지은 죄의 부끄러움까지도
1주일에 하루만큼은 하느님께 자신을 위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고,
다른 사람 생각하느라 자신도 모르게 죽어가는 자기 마음을 살리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자기 마음을 살리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머리로 세상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이 사랑하는 진짜 자신을 볼 수 있고,
하느님이 주신 십자가가 힘든 고통이 아니라
하느님이 진짜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게 해 주소서. 아멘.”
오늘 제 2 독서 로마서 6,3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세례는 새로운 생명으로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죽음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닌 십자가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생기 있고, 윤기 있고 빛나기 때문에 갖고 싶고
한 번 잡으면 놓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욕심이 생깁니다.
자기 자신 안에서 살아있음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
또한 하느님께 그 은총을 구하기 위해 기도합니다.
물론 이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례 받은 그리스도교 신자이기에 우리 안에 있는 어둠,
즉 죽음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이 스치운다.”
우리가 잘 아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자신의 시 서시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쓰고 있습니다.
간혹 왜 그가 “살아있는 것을 사랑하겠다.”고 하지 않고,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다.”고 했는지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나와 우리 가족이 더 성공하고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한 것을 구하기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힘이 되고 희망이 되고 도움이 되는 은총을 구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 가족들의 건강과 은총을 위해 기도하면서 돌보지 못한 것,
즉, 자기 자신의 아픈 시간들, 살아온 시간들 속에 담긴 땀과 수고로움들,
그 과정에서 겪었던 수많은 불안과 두려움을 위로하는 것 또한 필요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이고,
우리를 죽음을 넘어 새로운 삶으로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윤동주 시인에게 죽어가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리고 우리에게 있어 죽어가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먼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그러나 위로받지 못한 어둠과 슬픔과 두려움들입니다.
사람들은 어른이 된 어느 날부터 이제는 누군가를 위해 살아갑니다.
가족을 위해 살고, 성공을 위해, 더 빛나는 삶을 위해 자신을 가꾸며 삽니다.
그러면서 점점 자신의 어둠에 대해, 자신의 수고로움에 대해 위로하기 보다는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성공을 위해 기도하고, 더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두려움과 부끄러움에 대해서는 그리고 자신의 아픔에 대해서는
잘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윤동주 시인이 서시에서 말하는 “죽어가는 것들”이겠죠.
여러분도 1주일에 한 번만큼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 기도하길 바랍니다.
매일 가족의 십자가만 지고 기도하지 말고,
매일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지고 위로하고 사랑하지 말고,
1주일에 한 번만큼은 지금까지 수고하며 살아온 자신을 위로하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지기에 앞서, 자신의 십자가를 안고 위로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 어떻게 했는데, 내가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는데,
내가 회사를 위해, 내가 친구를 위해, 내가 교회를 위해 어떻게 했는데 하며
살아있는 것만을 좇아 열심히 달리느라 돌보지 못하고 위로하지 못한
자신의 수고로움과 희생과 아픔과 고통들
그리고 가능하며 살며 하느님 앞에 지은 죄의 부끄러움까지도
1주일에 하루만큼은 하느님께 자신을 위해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고,
다른 사람 생각하느라 자신도 모르게 죽어가는 자기 마음을 살리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자기 마음을 살리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머리로 세상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보고,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이 사랑하는 진짜 자신을 볼 수 있고,
하느님이 주신 십자가가 힘든 고통이 아니라
하느님이 진짜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게 해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