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다락방에 숨어서 어쩔 줄 몰라했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도 예수님을 믿지 못해 내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고, 손가락을 넣어 보아야 믿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늘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너희에게 평화를 주겠다" 하시는데도
제자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여전히 하늘만 쳐다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자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 다락방에 들어가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알지 못했습니다.
개중에는 깊은 신앙 체험을 통해 성령에 대해 알고 계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이 성령에 대해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많이 듣긴 하지만 잘 알지 못합니다.
어떤 신자들은 성령을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데 가슴이 뜨거워지고, 온 몸이 뜨거워졌는데, 그때 저는 성령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또 어떤 이는
“어떤 분들은 이상한 말, 즉 방언을 하면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어떤 분들은 귀신을 쫒아내거나, 하느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것을 체험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오늘 내가 시장을 봐야 하는데, 하느님이 어느 곳에 가야지 물건을 가장 싸게 사는 지 알려주셨다”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성령을 체험하는 방법은 다 다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성령이 주시는 은사는 우리에게 “사랑을 시작”하게 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뒤, 꽁꽁 잡가둔 방에서 나와 세상에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그분의 사랑이 어떤 것이지 말하고,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그 사랑을 살아갈지 보여주기 시작했다는 것을 잊으셔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의 성령이 불같이 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방언을 할 능력을 주셨고, 음성을 들려주셨다면,
그리고 하다 못해 하느님의 도움으로 시장에서 물건을 싸게 사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일,
즉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시작하는 일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령의 은사를 모욕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것처럼,
그리고 우리에게 너희에게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하신 것처럼,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있고, 예수님이 보내주시는 성령을 언제나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성령을 제대로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령이란 어떤 분이실까요?
예수님께서는 요한 15,5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예수님께서는 왜 당신을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혹 포도나무를 심어보신 분은 알 것입니다. 포도나무를 밭에 묘목을 심어보신 분들은 포도나무가 아주 연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나무나 느티나무처럼 스스로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자라지 못합니다. 포도나무는 하늘을 향해 스스로 꼿꼿하게 자라지 못합니다.
그냥 묘목만 심어두면 위로 자라지 못하고 땅으로 힘없이 자라며 쓰러지고 맙니다.
그래서 포도나무는 곁에 튼튼한 지줏대 혹은 버팀목을 박아줍니다. 그러면 포도나무가 그 지줏대를 의지하고 감으면서 위로 자라게 됩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도 그렇게 연약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느님 아버지께 의지하며 사셨듯,
예수님은 당신이 떠나가신 뒤 우리가 믿고 의지하며 살아갈, 삶의 버팀목, 삶의 지줏대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욕심내고 죄 짓고 살게 하는 힘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뜻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이 되어주시고, 힘이 되어주시고, 삶의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부의 뜻이 아니면 이 세상을 살아갈 의미가 없었던 것처럼,
성령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로써 살아갈 의미를 주고, 힘을 주고, 삶을 이끌어주시는 인도자이십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느님을 붙잡고 기대어 사신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 안에서 살 수 있도록 붙잡고 의지하고 기대어 살 수 있는 인도자를 보내주신다고 말씀하시며 보내주신 분이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을까요? 사람들이 무서워 골방에 숨었던 제자들처럼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 안에 갇혀서 혼자 슬퍼하고, 혼자 무서워하고, 혼자 죄의 굴레에 빠져 있지 말라고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성령께 의지하여 자신을 표현하고, 말하고, 용서하고 위로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기뻐하며 살라고 보내 주신 역동적인 힘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성령을 사는 데에는 한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만을 따르기 위해 아버지께 기도하고, 성찰하고, 용기를 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예수님의 뜻만을 살고자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께 의지해야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님, 저를 당신께 맡깁니다. 저에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십시오.
지금 이 순간 제가 어찌해야 하느님 마음에 드는 지 알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살아갈 용기를 주십시오.”라며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령께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 때,
비로서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을 따라, 성령을 정말 예수님의 포도나무처럼 몸에 칭칭 감고 살아가는 참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약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의 버팀목이 되어주시고, 인도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시작할 일은 성령과 함께 "사랑을 시작하는 것" 만이 남았습니다.
성령은 사랑을 시작하게 하는 용기이자, 사랑하는 시작하는 힘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사랑하라."
그 말은 곧 "성령을 받아라"임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받은 성령이 사랑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다락방에 숨어서 어쩔 줄 몰라했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에도 예수님을 믿지 못해 내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고, 손가락을 넣어 보아야 믿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늘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너희에게 평화를 주겠다" 하시는데도
제자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여전히 하늘만 쳐다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자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 다락방에 들어가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알지 못했습니다.
개중에는 깊은 신앙 체험을 통해 성령에 대해 알고 계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이 성령에 대해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많이 듣긴 하지만 잘 알지 못합니다.
어떤 신자들은 성령을 이렇게 알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데 가슴이 뜨거워지고, 온 몸이 뜨거워졌는데, 그때 저는 성령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또 어떤 이는
“어떤 분들은 이상한 말, 즉 방언을 하면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어떤 분들은 귀신을 쫒아내거나, 하느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것을 체험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오늘 내가 시장을 봐야 하는데, 하느님이 어느 곳에 가야지 물건을 가장 싸게 사는 지 알려주셨다”고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사람마다 성령을 체험하는 방법은 다 다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성령이 주시는 은사는 우리에게 “사랑을 시작”하게 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뒤, 꽁꽁 잡가둔 방에서 나와 세상에서 예수님이 누구인지,
그분의 사랑이 어떤 것이지 말하고,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그 사랑을 살아갈지 보여주기 시작했다는 것을 잊으셔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의 성령이 불같이 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방언을 할 능력을 주셨고, 음성을 들려주셨다면,
그리고 하다 못해 하느님의 도움으로 시장에서 물건을 싸게 사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일,
즉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시작하는 일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령의 은사를 모욕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것처럼,
그리고 우리에게 너희에게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하신 것처럼,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있고, 예수님이 보내주시는 성령을 언제나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성령을 제대로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령이란 어떤 분이실까요?
예수님께서는 요한 15,5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예수님께서는 왜 당신을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혹 포도나무를 심어보신 분은 알 것입니다. 포도나무를 밭에 묘목을 심어보신 분들은 포도나무가 아주 연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나무나 느티나무처럼 스스로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자라지 못합니다. 포도나무는 하늘을 향해 스스로 꼿꼿하게 자라지 못합니다.
그냥 묘목만 심어두면 위로 자라지 못하고 땅으로 힘없이 자라며 쓰러지고 맙니다.
그래서 포도나무는 곁에 튼튼한 지줏대 혹은 버팀목을 박아줍니다. 그러면 포도나무가 그 지줏대를 의지하고 감으면서 위로 자라게 됩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도 그렇게 연약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느님 아버지께 의지하며 사셨듯,
예수님은 당신이 떠나가신 뒤 우리가 믿고 의지하며 살아갈, 삶의 버팀목, 삶의 지줏대를 보내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욕심내고 죄 짓고 살게 하는 힘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뜻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이 되어주시고, 힘이 되어주시고, 삶의 버팀목이 되어 주는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부의 뜻이 아니면 이 세상을 살아갈 의미가 없었던 것처럼,
성령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로써 살아갈 의미를 주고, 힘을 주고, 삶을 이끌어주시는 인도자이십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하느님을 붙잡고 기대어 사신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 안에서 살 수 있도록 붙잡고 의지하고 기대어 살 수 있는 인도자를 보내주신다고 말씀하시며 보내주신 분이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을까요? 사람들이 무서워 골방에 숨었던 제자들처럼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 안에 갇혀서 혼자 슬퍼하고, 혼자 무서워하고, 혼자 죄의 굴레에 빠져 있지 말라고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성령께 의지하여 자신을 표현하고, 말하고, 용서하고 위로하며 하느님의 사랑을 기뻐하며 살라고 보내 주신 역동적인 힘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성령을 사는 데에는 한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의 뜻만을 따르기 위해 아버지께 기도하고, 성찰하고, 용기를 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예수님의 뜻만을 살고자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께 의지해야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님, 저를 당신께 맡깁니다. 저에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십시오.
지금 이 순간 제가 어찌해야 하느님 마음에 드는 지 알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살아갈 용기를 주십시오.”라며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령께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 때,
비로서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을 따라, 성령을 정말 예수님의 포도나무처럼 몸에 칭칭 감고 살아가는 참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약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의 버팀목이 되어주시고, 인도자가 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시작할 일은 성령과 함께 "사랑을 시작하는 것" 만이 남았습니다.
성령은 사랑을 시작하게 하는 용기이자, 사랑하는 시작하는 힘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사랑하라."
그 말은 곧 "성령을 받아라"임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받은 성령이 사랑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