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서와 신약 성서 그리고 교회의 전통 안에서 보면 승천한 사람은 세 사람입니다.
구약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 엘리야와
신약의 가장 완전한 인간 예수님,
그리고 교회 역사 안에 가장 거룩한 어머니 성모님이십니다.
그들이 승천하기 전에 어떠한 모습을 살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엘리야는 야훼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바알 예언자들과 투쟁했고, 하느님의 산 호렙에 가기 위해 40일간을 걸었으며,
강한 바람과 지진 그리고 불 속이 아닌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 가운데서(1열왕 19,9-14)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엘리야가 승천하기 전에 엘리야에게는 바로 하느님과 이스라엘을 향한 온전한 헌신과 뜨거운 사랑이 있었습니다.
엘리야의 승천은 먼저 이러한 자기 열정과 헌신이 있은 뒤에 온 하느님의 응답이었던 것이죠.
엘리야의 승천은 엘리야가 구약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임을 드러내주는 징표이자 그것을 확증해 주는 하느님의 표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가 충분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전 생애를 통해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일하셨고 마침내는 당신을 완전한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바로 하느님과 인간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비운 자기 비허의 삶을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기비허의 삶이 목숨까지도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 있었던 다음,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이라는 하느님의 표징이 있었습니다.
성모님은 일생을 고통으로 점철된 삶을 사셨고, 아들 예수를 위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랑의 삶을 사셨습니다.
또한 교회 공동체와 함께 기도하셨고, 평생을 예수님과 교회를 위해 숨은 생활을 하셨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성모님의 삶을 오랜 세월 묵상하고 또 묵상하고 난 뒤에 성모님이 승천하셨음을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그렇게 승천하기 전에 예수님과 교회를 위한 온전한 자기 헌신과 숨은 생활을 사셨습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그러한 항구한 사랑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이렇듯이 승천이 있기 전에 먼저 삶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을 위한 뜨거운 사랑이 먼저 있었던 것이죠.
자신의 욕심, 욕망을 버리고 하느님과 인간을 먼저 생각하고 노력했던 삶에 대해 하느님은 승천이라는 놀라운 표징으로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고 말하는 것을 어떤 의미로 알아들을까요?
오늘날 초등학교 저학년이나 유치원생들에게 물어본다면 아마도 구름을 타고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말할 것입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그 이상의 학생들에게는 하늘 넘어, 지구 너머 우주의 어느 한 곳으로 간 것은 아닌가 하고 말하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묻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 있어 그 답은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승천을 통해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원하시는 시간이면 언제나, 당신이 원하시는 장소이면 어느 곳이나 현존하실 수 있는 분이 되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심으로써 하느님의 생명을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 되셨습니다.
승천은 “땅에서 하늘로” 라는 장소적 이동 개념이 아니라, 보이는 분에서 보이지 않는 분으로 살아계시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심으로써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럼 오늘날 우리도 승천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연은 아래로 흘러갑니다. 노자 도덕경에 상선약수라고 자연의 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죠.
지고한 선을 물과 같다는 말과 같고, 진리는 물과 같다고 말합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흘러갑니다. 그리고 사과 열매는 땅으로 떨어지죠.
사람들은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고 물리적 법칙이자 진리의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것, 생명이 있는 것은 조금 다릅니다. 나무는 위로 자랍니다. 물고기도 물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생명이 있는 존재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또 다른 진리의 법칙은 바로 이렇게 위로 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역시 생명 있는 존재이기에 위를 바라보고, 하늘을 바라보고 천상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땅에 살지만 하늘과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육체를 지니고 육체의 무거움 안에서 살지만 영혼의 깊이를 들어 올리며 살아갑니다.
땅에 매이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늘보다 더 큰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위로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천상의 것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늘에 오르지 못하도록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무겁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마도 욕심이고, 가장 큰 욕심은 소유욕입니다.
엘리야나 예수님 그리고 성모님의 승천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 그리고 자기 비움의 삶을 통해 일어난 하느님의 표징입니다.
영혼을 먼저 가볍게 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욕심들이 무엇인지 알아채고 그것을 가볍게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그러면 하늘을 오르는 기쁨들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 성서와 신약 성서 그리고 교회의 전통 안에서 보면 승천한 사람은 세 사람입니다.
구약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 엘리야와
신약의 가장 완전한 인간 예수님,
그리고 교회 역사 안에 가장 거룩한 어머니 성모님이십니다.
그들이 승천하기 전에 어떠한 모습을 살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엘리야는 야훼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바알 예언자들과 투쟁했고, 하느님의 산 호렙에 가기 위해 40일간을 걸었으며,
강한 바람과 지진 그리고 불 속이 아닌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 가운데서(1열왕 19,9-14)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엘리야가 승천하기 전에 엘리야에게는 바로 하느님과 이스라엘을 향한 온전한 헌신과 뜨거운 사랑이 있었습니다.
엘리야의 승천은 먼저 이러한 자기 열정과 헌신이 있은 뒤에 온 하느님의 응답이었던 것이죠.
엘리야의 승천은 엘리야가 구약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임을 드러내주는 징표이자 그것을 확증해 주는 하느님의 표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가 충분히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전 생애를 통해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일하셨고 마침내는 당신을 완전한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바로 하느님과 인간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비운 자기 비허의 삶을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기비허의 삶이 목숨까지도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 있었던 다음,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이라는 하느님의 표징이 있었습니다.
성모님은 일생을 고통으로 점철된 삶을 사셨고, 아들 예수를 위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랑의 삶을 사셨습니다.
또한 교회 공동체와 함께 기도하셨고, 평생을 예수님과 교회를 위해 숨은 생활을 하셨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성모님의 삶을 오랜 세월 묵상하고 또 묵상하고 난 뒤에 성모님이 승천하셨음을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그렇게 승천하기 전에 예수님과 교회를 위한 온전한 자기 헌신과 숨은 생활을 사셨습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그러한 항구한 사랑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이렇듯이 승천이 있기 전에 먼저 삶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을 위한 뜨거운 사랑이 먼저 있었던 것이죠.
자신의 욕심, 욕망을 버리고 하느님과 인간을 먼저 생각하고 노력했던 삶에 대해 하느님은 승천이라는 놀라운 표징으로 응답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고 말하는 것을 어떤 의미로 알아들을까요?
오늘날 초등학교 저학년이나 유치원생들에게 물어본다면 아마도 구름을 타고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말할 것입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그 이상의 학생들에게는 하늘 넘어, 지구 너머 우주의 어느 한 곳으로 간 것은 아닌가 하고 말하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묻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 있어 그 답은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승천을 통해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원하시는 시간이면 언제나, 당신이 원하시는 장소이면 어느 곳이나 현존하실 수 있는 분이 되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심으로써 하느님의 생명을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 되셨습니다.
승천은 “땅에서 하늘로” 라는 장소적 이동 개념이 아니라, 보이는 분에서 보이지 않는 분으로 살아계시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심으로써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럼 오늘날 우리도 승천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연은 아래로 흘러갑니다. 노자 도덕경에 상선약수라고 자연의 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죠.
지고한 선을 물과 같다는 말과 같고, 진리는 물과 같다고 말합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흘러갑니다. 그리고 사과 열매는 땅으로 떨어지죠.
사람들은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고 물리적 법칙이자 진리의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것, 생명이 있는 것은 조금 다릅니다. 나무는 위로 자랍니다. 물고기도 물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생명이 있는 존재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또 다른 진리의 법칙은 바로 이렇게 위로 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역시 생명 있는 존재이기에 위를 바라보고, 하늘을 바라보고 천상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땅에 살지만 하늘과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육체를 지니고 육체의 무거움 안에서 살지만 영혼의 깊이를 들어 올리며 살아갑니다.
땅에 매이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늘보다 더 큰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위로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천상의 것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늘에 오르지 못하도록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무겁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마도 욕심이고, 가장 큰 욕심은 소유욕입니다.
엘리야나 예수님 그리고 성모님의 승천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열정 그리고 자기 비움의 삶을 통해 일어난 하느님의 표징입니다.
영혼을 먼저 가볍게 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욕심들이 무엇인지 알아채고 그것을 가볍게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그러면 하늘을 오르는 기쁨들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