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인간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우리를 화나게 하고 아픔을 주는 사람을 용서하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도 힘든 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뻔뻔하기까지 한 원수를 사랑하기까지 하려면
정말 큰 인내와 큰 사랑이 필요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선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모두에게 똑같이 대해 주신다고 하니
어떤 때는 그런 예수님의 태도도 이해되지 않고 화가 납니다.
선한 사람에게 상을 주시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주셔야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하느님의 이런 생각과 이상은 사람들에게 멀게만 느껴집니다.
죄 많은 인간인 우리 자신으로서는 하느님같이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일까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결국은 원수인 그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원수인 상대방이 변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가 변하지 않고 그 상태로 머문다면 그는 “원수인 채”로 있을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그래서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을 다시 곱씹어 봅니다.
원수를 사랑하려 애쓰고, 용서하려 애쓰는 것은 실제로 우리 자신을 살리는 작업입니다.
사랑하기 힘들고, 용서하기 힘들어 하느님께 “사랑할 힘을 달라.” 기도하고,
“용서할 수 있게 은총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살리는 것입니다.
반대로 원수를 미워하면 어떨까요?
그때에는 원수를 사랑하기는 커녕 용서하지 못해서 하느님 앞에 얼굴도 들지 못한 채,
여전히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괴로울 것입니다.
때로는 원수 같은 사람이 생각만 나도 화가 나고,
행여나 얼굴을 보게 된다면 분노가 치밀어 마음이 요통치고,
온갖 나쁜 생각이 떠오르며 몸과 마음을 뒤흔들어 놓기도 합니다.
그렇게 화가 치밀고, 분노가 일고, 마음이 어지러워지면 결국 누가 손해일까요?
자기 자신만 손해입니다.
왜냐하면 원수는 자신의 잘못도 모른 채 유유자적할테니까요.
결국 그 사람 때문에 자신의 마음과 영혼이 또 죽고, 마침내는 몸마저 상하고 맙니다.
예수님은 이미 산상수훈을 통해
“자비로운 사람은 자비를 입을 것”(마태 5,7)이라고 말씀하시며,
자비를 베푸는 것이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행복해지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자비를 베푸는 것 자체로 이미 우리 자신 스스로
치유되고 행복해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것, 즉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다른 이를 살리기 위한 것 이전에,
자신의 생명을 살려,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고, 하느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게 되고,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로 인해 자신을 화나게 하고, 우울하게 하고,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마음 속으로라도 “나쁜 *, 니가 내 십자가다!”, “애구, 니가 내 웬수다.”하지 마시고,
“예수님, 저 불쌍한 사람을 가엾게 여겨주세요.”하며,
원수를 “불쌍한 영혼을 지닌 사람”으로 여겨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여전히 마음이 힘들고 어렵다면 그렇게 기도하셔도 됩니다.
“예수님 저는 지금 당장은 저 사람 용서하기 힘드니, 제 대신 당신이 알아서 해주세요.”하고
예수님께 떠넘기세요.
그럴 때 자연스레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완전함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사랑하는 하느님을 깊이 체험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여 자비를 베푸는 것은 근본적으로 먼저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것이고,
자신의 생명과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내면의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키우며 원수까지 사랑하고자 할 때
우리는 사랑하는데 좀 더 힘을 낼 수 있고 지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혹여나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봉사와 희생에 지치고 쓰러진다 해도
다시 일어나 사랑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 그것은 곧 자신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인간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우리를 화나게 하고 아픔을 주는 사람을 용서하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도 힘든 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뻔뻔하기까지 한 원수를 사랑하기까지 하려면
정말 큰 인내와 큰 사랑이 필요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선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모두에게 똑같이 대해 주신다고 하니
어떤 때는 그런 예수님의 태도도 이해되지 않고 화가 납니다.
선한 사람에게 상을 주시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주셔야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하느님의 이런 생각과 이상은 사람들에게 멀게만 느껴집니다.
죄 많은 인간인 우리 자신으로서는 하느님같이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일까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결국은 원수인 그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원수인 상대방이 변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가 변하지 않고 그 상태로 머문다면 그는 “원수인 채”로 있을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그래서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말씀을 다시 곱씹어 봅니다.
원수를 사랑하려 애쓰고, 용서하려 애쓰는 것은 실제로 우리 자신을 살리는 작업입니다.
사랑하기 힘들고, 용서하기 힘들어 하느님께 “사랑할 힘을 달라.” 기도하고,
“용서할 수 있게 은총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살리는 것입니다.
반대로 원수를 미워하면 어떨까요?
그때에는 원수를 사랑하기는 커녕 용서하지 못해서 하느님 앞에 얼굴도 들지 못한 채,
여전히 누군가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괴로울 것입니다.
때로는 원수 같은 사람이 생각만 나도 화가 나고,
행여나 얼굴을 보게 된다면 분노가 치밀어 마음이 요통치고,
온갖 나쁜 생각이 떠오르며 몸과 마음을 뒤흔들어 놓기도 합니다.
그렇게 화가 치밀고, 분노가 일고, 마음이 어지러워지면 결국 누가 손해일까요?
자기 자신만 손해입니다.
왜냐하면 원수는 자신의 잘못도 모른 채 유유자적할테니까요.
결국 그 사람 때문에 자신의 마음과 영혼이 또 죽고, 마침내는 몸마저 상하고 맙니다.
예수님은 이미 산상수훈을 통해
“자비로운 사람은 자비를 입을 것”(마태 5,7)이라고 말씀하시며,
자비를 베푸는 것이 하느님의 자비를 입어 행복해지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자비를 베푸는 것 자체로 이미 우리 자신 스스로
치유되고 행복해질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것, 즉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다른 이를 살리기 위한 것 이전에,
자신의 생명을 살려,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고, 하느님 앞에 부끄럽지 않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게 되고,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체험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로 인해 자신을 화나게 하고, 우울하게 하고,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마음 속으로라도 “나쁜 *, 니가 내 십자가다!”, “애구, 니가 내 웬수다.”하지 마시고,
“예수님, 저 불쌍한 사람을 가엾게 여겨주세요.”하며,
원수를 “불쌍한 영혼을 지닌 사람”으로 여겨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여전히 마음이 힘들고 어렵다면 그렇게 기도하셔도 됩니다.
“예수님 저는 지금 당장은 저 사람 용서하기 힘드니, 제 대신 당신이 알아서 해주세요.”하고
예수님께 떠넘기세요.
그럴 때 자연스레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완전함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사랑하는 하느님을 깊이 체험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여 자비를 베푸는 것은 근본적으로 먼저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것이고,
자신의 생명과 삶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내면의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키우며 원수까지 사랑하고자 할 때
우리는 사랑하는데 좀 더 힘을 낼 수 있고 지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혹여나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봉사와 희생에 지치고 쓰러진다 해도
다시 일어나 사랑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 그것은 곧 자신을 살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