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제자 필립보가 누구인지,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3-44에 따르면 예수님이 안드레아와 시몬 베드로를
당신의 제자로 처음으로 거둔 다음 날 만나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초대했던 제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 불린 다음 나타나엘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죠.
"우리는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자들의 글에 기록되어 있는 분을 만났소."
처음부터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르며 배우던 필립보가
오늘 예수님께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고 하니 말하자,
예수님은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나를 보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하고 일러주십니다.
지난 성유축성 미사 때 금경축 맞이하신 신부님이 인사말 중에
“나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지만, 하느님을 믿고 행복하게 살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직히 그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신부님의 그 말을 글자 그대로 알아 듣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라는 전후 맥락없는 말에는 놀랐습니다.
사실 사제나 수도자, 평신도 등 모든 신앙인들이 사후의 부활과 구원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이 세상에서 하느님과의 만남과 신비에 참여하는 기쁨을 기대합니다.
저도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뵌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과의 만남 없이 이 삶을 이제껏 살지는 않았습니다.
신앙을 사는 동안 나의 삶 가까이에서 나를 위해 애쓰시는 하느님을 수없이 만났습니다.
하느님이 그렇게 다가와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그러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 질 것이다.”(잠언 18,3)라고 말씀하시지만,
주도권을 하느님께 내어 놓기보다는 늘 다른 핑계를 대려고 합니다.
오히려 손 내미는 하느님이 때로는 두렵기도 합니다.
그 손을 잡으면 나는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어 손을 살짝 밖에 못 내밀곤 합니다.
필립보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하는 말이 마치
주님이 내미는 손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것을 손에 쥔 하느님을 보여달라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저를 돌아보면 상처받는 것이 싫고, 하느님 계획에 나 자신을 내어 놓는 것이 두려워서
주님께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조건을 내걸거나, 게으름 피우거나, 도망치는 것 같습니다.
필립보의 투정에 예수님이 일침을 놓으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
그리고 필립보를 비롯해 사도들과 부르심에 도망치는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4)
오늘 복음을 읽으며,
필립보와 우리를 부르신 첫 순간부터 언제나 함께 하셨고,
당신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하느님을
나를 지금 이 순간, 어떤 마음으로 부르고 있는지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왜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그것은 아마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이
“두려워 말고 나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자.”라고 초대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의 “빛이 되어 주시는”(미카 7,8) 주님과 함께 행복한 하루 되길 바랍니다. 아멘.
(사진 - "떨어지는 별" 1884, 비톨드 프루슈코프스키 作, 폴란드 바르샤바 국립박물관)

예수님의 제자 필립보가 누구인지, 자세히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3-44에 따르면 예수님이 안드레아와 시몬 베드로를
당신의 제자로 처음으로 거둔 다음 날 만나 "나를 따라 오너라"라고 초대했던 제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 불린 다음 나타나엘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죠.
"우리는 모세의 율법서와 예언자들의 글에 기록되어 있는 분을 만났소."
처음부터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르며 배우던 필립보가
오늘 예수님께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고 하니 말하자,
예수님은 아직도 모른단 말이냐? "나를 보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하고 일러주십니다.
지난 성유축성 미사 때 금경축 맞이하신 신부님이 인사말 중에
“나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지만, 하느님을 믿고 행복하게 살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직히 그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신부님의 그 말을 글자 그대로 알아 듣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라는 전후 맥락없는 말에는 놀랐습니다.
사실 사제나 수도자, 평신도 등 모든 신앙인들이 사후의 부활과 구원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이 세상에서 하느님과의 만남과 신비에 참여하는 기쁨을 기대합니다.
저도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뵌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과의 만남 없이 이 삶을 이제껏 살지는 않았습니다.
신앙을 사는 동안 나의 삶 가까이에서 나를 위해 애쓰시는 하느님을 수없이 만났습니다.
하느님이 그렇게 다가와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그러면)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 질 것이다.”(잠언 18,3)라고 말씀하시지만,
주도권을 하느님께 내어 놓기보다는 늘 다른 핑계를 대려고 합니다.
오히려 손 내미는 하느님이 때로는 두렵기도 합니다.
그 손을 잡으면 나는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어 손을 살짝 밖에 못 내밀곤 합니다.
필립보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하는 말이 마치
주님이 내미는 손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것을 손에 쥔 하느님을 보여달라는 소리처럼 들립니다.
저를 돌아보면 상처받는 것이 싫고, 하느님 계획에 나 자신을 내어 놓는 것이 두려워서
주님께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조건을 내걸거나, 게으름 피우거나, 도망치는 것 같습니다.
필립보의 투정에 예수님이 일침을 놓으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단 말이냐."
그리고 필립보를 비롯해 사도들과 부르심에 도망치는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4)
오늘 복음을 읽으며,
필립보와 우리를 부르신 첫 순간부터 언제나 함께 하셨고,
당신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하느님을
나를 지금 이 순간, 어떤 마음으로 부르고 있는지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왜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그것은 아마도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이
“두려워 말고 나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자.”라고 초대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의 “빛이 되어 주시는”(미카 7,8) 주님과 함께 행복한 하루 되길 바랍니다. 아멘.
(사진 - "떨어지는 별" 1884, 비톨드 프루슈코프스키 作, 폴란드 바르샤바 국립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