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 복음이야기 속 침묵에 대한 인상적인 장면이 3가지 있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 8장의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처벌하라는 사건 가운데 일어난
짧은 두 번의 침묵과
마태 1장 (19-20절)의 요셉이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려 할 때의 밤의 침묵,
그리고 루카 1장 (20절)의 즈카르야가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해
강제로 9달 동안 벙어리가 된 침묵입니다.
(이 외에도 빌라도의 재판정 앞에선 예수님의 침묵 등 다른 장면도 있다.)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한 즈카리야의 불신의 한 가운데서 지내야 했던 9달의 침묵과,
배려라는 자기 합리화의 도피 속에 감추어져 있는 두려움으로 휩싸인 요셉의 밤의 침묵
그리고 단죄와 분노의 표출이라는 아우성 가득한 가운데 일어난
예수님의 짧은 두 번의 침묵은 저에게 하느님의 마음,
다른 말로 사랑의 마음이 아니라면 차라리 “말을 하지 말라.”라는 소리로 들립니다.
하느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말하고, 듣고, 대화합니다.
그렇게 듣고 말하고 대화하는 가운데,
우리는 자주 누군가를 비방하거나, 자기 자랑이나 자기 변명
심지어는 죄의 수렁으로 끌어당기는 감언이설에 노출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심한 경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처럼
죄의 심판과 처벌에 동참할 것을 강요받기도 합니다.
침묵은 명상이나 자기 성찰의 일환으로 행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언급하는 세 가지 침묵의 장면에서의 침묵은 분명
(하느님 뜻에 맞게) “올바르게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9달 뒤에 즈카리야는 천사가 마음에 심어준 말을 쓰며 입이 터져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상대의 이름을 올바르게 말한다는 것은
그의 인격을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존중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요셉이 밤의 침묵 동안 만난 천사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며 침묵을 깬 것은
도피라는 거짓된 배려가 아닌,
사랑으로 함께하는 동반자가 되는 배려를 몸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인격과 화해하는 것이자 마리아의 인격
나아가 예수의 인격과 화해하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 요한 복음 8장에 등장하는 두 번의 침묵의 시간은
첫 번째로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죄의 뿌리에 사로잡힌 자신의 인격과 만나게 하였고,
두 번째로는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에게
자신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진정한 인격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합니다.
말해야 할 때가 있고 말을 삼켜야 할 때가 있겠죠.
우리가 그때를 안다는 것은 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입으로 가시를 내뱉기 전에
자신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소리가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마주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신과 타인에 대해 다른 태도를 취할 준비가 되어 있음은 분명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끔은 마음이 따뜻해질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면,
우리가 입을 열어 말하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사랑이 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음이 따뜻해질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인내의 은총을 내려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저에게 복음이야기 속 침묵에 대한 인상적인 장면이 3가지 있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 8장의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처벌하라는 사건 가운데 일어난
짧은 두 번의 침묵과
마태 1장 (19-20절)의 요셉이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려 할 때의 밤의 침묵,
그리고 루카 1장 (20절)의 즈카르야가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해
강제로 9달 동안 벙어리가 된 침묵입니다.
(이 외에도 빌라도의 재판정 앞에선 예수님의 침묵 등 다른 장면도 있다.)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한 즈카리야의 불신의 한 가운데서 지내야 했던 9달의 침묵과,
배려라는 자기 합리화의 도피 속에 감추어져 있는 두려움으로 휩싸인 요셉의 밤의 침묵
그리고 단죄와 분노의 표출이라는 아우성 가득한 가운데 일어난
예수님의 짧은 두 번의 침묵은 저에게 하느님의 마음,
다른 말로 사랑의 마음이 아니라면 차라리 “말을 하지 말라.”라는 소리로 들립니다.
하느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말하고, 듣고, 대화합니다.
그렇게 듣고 말하고 대화하는 가운데,
우리는 자주 누군가를 비방하거나, 자기 자랑이나 자기 변명
심지어는 죄의 수렁으로 끌어당기는 감언이설에 노출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심한 경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처럼
죄의 심판과 처벌에 동참할 것을 강요받기도 합니다.
침묵은 명상이나 자기 성찰의 일환으로 행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언급하는 세 가지 침묵의 장면에서의 침묵은 분명
(하느님 뜻에 맞게) “올바르게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9달 뒤에 즈카리야는 천사가 마음에 심어준 말을 쓰며 입이 터져 하느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상대의 이름을 올바르게 말한다는 것은
그의 인격을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존중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요셉이 밤의 침묵 동안 만난 천사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며 침묵을 깬 것은
도피라는 거짓된 배려가 아닌,
사랑으로 함께하는 동반자가 되는 배려를 몸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인격과 화해하는 것이자 마리아의 인격
나아가 예수의 인격과 화해하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 요한 복음 8장에 등장하는 두 번의 침묵의 시간은
첫 번째로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죄의 뿌리에 사로잡힌 자신의 인격과 만나게 하였고,
두 번째로는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에게
자신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진정한 인격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합니다.
말해야 할 때가 있고 말을 삼켜야 할 때가 있겠죠.
우리가 그때를 안다는 것은 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입으로 가시를 내뱉기 전에
자신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소리가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마주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신과 타인에 대해 다른 태도를 취할 준비가 되어 있음은 분명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끔은 마음이 따뜻해질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면,
우리가 입을 열어 말하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사랑이 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음이 따뜻해질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인내의 은총을 내려주시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