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지 않고 일하는 사도 글라렛

성 안토니오 마리아 글라렛은 “쉬지 않고 일하는 사도”로 일컬어져 왔으며, 스페인 전국 및 중미, 쿠바 등지에서

놀라운 활동력을 펼치신 뛰어난 선교사였습니다.


글라렛 성인은 설교자, 교육자, 작가, 그리고 종교와 사회의 쇄신을 촉진시킨 남녀 수도회와 평신도 사도직회의

설립자로서 그의 사도적 소명을 끊임없이 수행하신 분입니다.

글라렛 성인은 늘 억압받는 사람들 편에서 섰으며, 특히 고통을 당하는 이들의 벗이었습니다.


후에는 쿠바 산티아고의 주교가 되셨고, 스페인 이사벨 여왕의 고해 신부이기도 하였습니다.

글라렛 성인 말년에 당시 스페인의 혼란스러웠던 여러 상황에 의해 프랑스로 강제 추방되어 1870년에 일생을

마치셨습니다.


그리고 1950년 5월 7일 글라렛 주교는 성인품에 오르셨습니다.

[ St. Antonio Maria Claret , 1807~1870 ]


글라렛 성인의 생애 01

소년 안토니오


안토니오 마리아 글라렛 성인은 1807년 12월 23일, 스페인 북동쪽에 위치한 까딸로니아 지방의 사옌트(Sallent)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분은 아버지 후안 글라넷(Juan Claret)과 어머니 호세파 글라라(Josefa Clara)사이에서 열일곱 명의 자녀들 중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분의 아버지는 자그마한 직물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그다지 부유하지는 않았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소년 안토니오는 이미 아주 어릴 적에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향해 초대하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의식을 강하게 체험했다.

소년은 죄인들이 영원한 불행의 나락에서 구제받기를 바랬으며 그들의 구원을 위해 일해야 할 소명을 깨달았다.

소년이 열한 살로 접어들었을 때, 한 주교님이 학교를 방문하여 소년에게서 커서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물어본 일이 있었다.

이에 소년은 주저없이 대답하였다.


“ 사제가 되고 싶습니다. ”

직공 안토니오


소년 안토니오는 적당한 나이가 들자 직물 공장의 견습공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가 17세에 접어들자, 그의 아버지는 그가 최신의 직물 제조 기술을 공부하면서 대규모의 직물 공장에서 업무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그를 바르셀로나로 보냈다.

그는 직물 디자인 학교에서 훌륭한 학업을 쌓은 결과 대규모 방직 회사들로부터 일해 달라는 제안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성공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제안들을 거절하였으며, 마침내 세속적 성취의 공허함을 느낀 나머지 고향으로 돌아갔다.

성소


어느 날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자기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루가 9,25)”라는 복음 구절이 그의 귓전에 울리고 있었다

그는 신학교에 들어갈 준비를 하기 위해 라틴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카르투시안 수도승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러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면서도 아들이 교구 사제가 되기를 더욱 바랬다.

결국 안토니오는 빅(Vic) 지방에 있는 교구 신학교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청년 안토니오는 21살이 되어 일년 간의 신학교 학업을 마쳤을 무렵 수도승의 성소를 따르고자 결심한 끝에 근처의 봉쇄 수도원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그곳으로 가는 도중에 그는 엄청난 폭풍을 만났다. 그는 폭풍을 뚫고 갈 만큼의 양호한 건강 상태를 느끼지 못하고 그곳으로 가려던 마음으로부터 돌아섰다.

청년 안토니오는 27살이 되던 해에 사제로 서품 받아 자기 고향 본당의 사목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마을은 자신의 사도적 열정을 발산하기에 너무도 좁았을 뿐 아니라, 교회에 적대적이었던 정치적 상황 역시 그의 사도직 활동에 많은 제한을 가했다.

마침내 글라렛 신부는 해외외방 선교에 투신하기 위해 로마의 포교성을 찾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일이 생각대로 진척되지 않자 그는 자신이 품고 있는 선교사의 꿈을 실현하고자 예수회에 입회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는 예수회의 수련자로 지내고 있을 무렵 이상한 병에 걸리게 되었다.

마침내 이러한 일로 인해 그의 장상 신부들은 하느님께서 글라렛 신부를 위해 다른 계획들을 품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결국 다시 한 번 글라렛 신부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삶 안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뜻에 따르고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글라렛 성인의 생애 02

까딸로니아와 카나리아 군도를 순회하는 ‘사도적 선교사’


글라렛 신부는 까딸로니아 지방의 한 본당으로 돌아온 후 여기 저기 마을들을 돌며 일반 사람들을 향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걸어서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며 탁월한 설교 솜씨로 많은 군중을 몰고 다녔다.

어떤 날에는 하루에 일곱 번이나 강론해야 했으며 10시간 동안 고백성사를 집전해야 했다.

그는 성모님께 자신의 모든 사도적 투신을 봉헌했다.

그는 성모님을 통해 사도로서 양성되고 복음선포를 위해 파견되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의 사도적 성공의 열쇠는 사랑이었다. 이에 대해 글라렛 성인은 자신의 자서전에 다음의 말을 남겼다.


“선교사에게 가장 필요한 미덕은 사람이다.

총을 발포하기 위해서는 화약의 불꽃이 필요하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에도 사랑이 필요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총알을 손으로 던진다면 아주 미약한 흔적만을 남길 것이다.

반면에 똑같은 총알이라도 뒤에 장전된 화약의 힘을 빌어 쓴다면 어떠한 목표를 파괴할 만한 가공의 힘을 얻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도 총알과 같은 이치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불타오른 선교사에 의해 전해질 때,

그것을 기적들을 일구어낼 것이다.” (자서전 438~439항)


어느덧 글라렛 신부의 유명세는 여기 저기로 퍼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영육간의 치유를 위해 그를 찾았다.

1842년 연말에 접어들 즈음 교황님은 글라렛 신부에게 “사도적 선교사”라는 칭호를 하사하셨다.

1847년, 글라렛 신부는 출판 매체가 행사하는 위력을 인식한 끝에 일군의 동료 사제들과 함께 종교 관련 출판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어서 그는 모든 사회계층에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서적 및 팜플렛들을 저술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점점 불안으로 치닫고 있던 스페인의 정치적 상황은 지속적으로 그의 삶을 위협하였고 그의 사도직 활동들에도 제한을 가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카나리아 군도에서의 복음선포 요청을 받아들여 그곳에서 14개월 동안 머물렀다.

글라렛 신부는 그곳에서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자신의 선교 활동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기 위한 선교사들의 수도회를 조직하고자 하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글라렛 선교수도회의 설립자, 그리고 쿠바의 대주교


1849년 7월 16일, 글라렛 신부는 자신의 꿈을 함께 나눌 일군의 사제들을 불러들였다.

이것이 오늘날 글라렛 선교수도회로 지칭되는 티없으신 성모성심의 아들들의 선교수도회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몇 일이 지나 그는 새로운 소임을 부여받게 되었다. 즉 그가 쿠바의 산티아고 대주교로 임명된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새로운 세계에서 하느님의 소명에 응답하기 위해 새로이 설립된 공동체를 떠나야 했다.

그는 두 달여의 여정을 거쳐서야 쿠바 제도에 도착하여 성모님께 봉헌된 자신의 주교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쿠바에 도착하자 마자 그는 쿠바의 주보로서 공경받고 있던 자애로우신 어머니의 성상이 있는 성당을 방문했다.

이어서 그는 특별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그리스도교적인 본적 교육의 절실한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이러한 실정에 부응하기 위해 글라렛 대주교는 안토니아 파리스 수녀(Antonia Paris)를 불려들여 스페인에서 재설립하는데 의견을 모으면서 그곳에서 수녀회를 설립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는 인간 발전의 모든 차원들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사목적 배려 하에 놓여있는 사람들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는데 탁월한 창의성을 발휘하였다.

글라렛 대주교가 쿠바에서 발휘했었던 탁월한 창의적 활동들 중에는 불우한 어린이들을 위한 상업, 직업 학교 운영과 가난한 이들이 이용할 수 있는 신용협동조합의 운영을 들 수 있다.

그분은 농민의 정신에 대한, 더 나아가 자신이 몸소 시험해 본 농사법들에 대한 책들을 저술하였다.

또한 그분은 교도소와 병원을 방문하여 그곳에 수용된 사람들을 돌보았고 억압받는 이들을 옹호하였으며 인종 차별주의에 항거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예상치 못한 반발이 다가왔다.

그분은 박해를 받기 시작했고, 결국 올긴(Holguin)이라는 도시에서 설교하고 있던 도중에 한 남자가 그분을 살해하려는 의도로 단도로 빰에 상처를 입혔다.

하지만 오히려 이에 대해 글라렛 대주교는 커다란 기쁨을 느꼈다.


“내가 그토록 원하였던 것을 이룬 것을 알고서 내 영혼이 느꼈던 환희와 기쁨과 즐거움은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었다.

내가 원하였던 것이 바로 예수님과 성모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피를 흘리는 것이었으며 복음의 진리들을 내 자신의 피로 증거하는 것이었다.” (자서전 577항)


쿠바에서 지낸 6년 여의 시간 동안 그분은 세 번에 걸쳐 광할한 대주교 관할구역 전체를 방문했다. 이 마을 저 마을을 순회하며...

기록에 의하면 그분은 첫 사목 방문 시기 동안 10만 명의 사람들에게 견진성사를, 9천 건의 성사혼의 주례를 집전하였다고 전해진다.


글라렛 성인의 생애 03

스페인 여왕의 고백 사제로서


1857년, 글라렛 대주교는 당시 스페인 여왕이었던 이사벨라(Isabella) 2세 여왕의 고백 사제로 봉사하기 위해 다시 스페인으로 복귀하였다.

글라렛 대주교는 본성상 귀족적인 삶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가난과 지극히 소박한 삶의 방식을 좋아했다.

그분읜 순명의 차원에서 고백 사제직을 받아들였지만 다른 선교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청원했다.

그리고 그러한 와중에서도 그분은 여왕과 여행해야 할 때마다 스페인의 여러 마을들에서 복음 선포할 수 있는 기회들을 잘

활용했다.

그 당시 왕이나 여왕이 공석 중인 교구의 주교직을 임명하던 상황에서, 글라렛 대주교는 스페인과 식민지 지역들의 거룩하게

축성된 주교들을 임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글라렛 대주교가 여왕의 고백 사제로서 보냈던 11년이라는 시간은 특별히 고통스러운 나날들이었다.

왜냐하면 교회의 적대자들이 그분을 향해 온갖 중상모략과 개인적 비방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었다.

1868년, 새로운 혁명이 봉기하자 여왕은 폐위되어 자신의 가족과 함께 망명의 길에 올랐다.

이에 글라렛 대주교의 삶 또한 위험에 처해졌고, 그분은 여왕을 동반하여 프랑스로 떠났다.

이러한 계기로 인해 그분은 파리에서 복음을 선포할 기회를 얻었다.

그분은 잠시동안 파리에서 머문 후에 로마로 가서 개인적으로 비오 9세 교황님을 알현하기도 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


1869년 12월 8일, 전세계로부터 모인 700여 명의 주교들이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위해 로마에 모였다.

그러한 공의회 교부들 속에 글라렛 대주교도 포함되어 있었다.

교황의 무오류성에 관한 주제가 논의될 때, 그분은 강력하게 교황의 무오류성을 옹호하면서 당신이 참석한 자리를 빛냈다.

결국 이에 대한 가르침은 공의회에서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믿을 교리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인해 공의회는 전체 일정을 채 마치기도 전에 중단되고 말았다.

글라렛 대주교의 건강은 더욱 쇠약해져 갔으며, 마침내 그분은 자신이 설립한 티없으신 성모성심의 아들들의 수도회 총장의 동반하에 프랑스로 되돌아갔다.

망명 중의 최후의 나날들


프랑스로 돌아온 글라렛 대주교는 같이 망명 중인 수도회의 선교사들과 함께 지냈다. 얼마 후 그분은 자신에게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어쩔 수 없이 그분은 프랑스 남부 지방 퐁프로이드(Fontfroide)에 있는 한 시토 수도원으로 은신해야 했다.

결국 1870년 10월 24일, 그곳에서 글라렛 대주교는 62세의 나이로 선종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마지막 요청으로서 당신의 묘비에 새겨져 수도회의 선교사들에게 남겨질 다음의 말을 전하셨다.


“ 나는 정의를 사랑했고 불의를 미워한 까닭에 망명 중에 이 세상을 떠납니다. ”


현재 글라렛 성인의 유해는 빅(Vic)에 모셔져 있다.

그분은 1934년 복자품으로 시복되었으며, 이후 1950년에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성인품으로 시성되었다.


180712월 23일 스페인 바로셀로나의 사옌트에서 출생

1825
바르셀로나의 직물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함

1829빅(Vic)에 있는 신학교에 입학

1835사제 서품을 받고 사예트에서 보좌 신부직 수행

1841까딸로니아에서 사도적 선교

1848카나리아 군도에서 선교

1849‘티없으신 성모성심의 아들들’의 선교 수도회 설립

1850미래에 재속 공동체가 된 ‘티없으신 성모성심의 딸들’ 공동체 기초 작업

185010월 6일 빅(Vic)에서 주교 서품 받음


1851쿠바에서 대주교로 선교

1855
마리아 안토니아 파리스 수녀와 함께 ‘티없으신 성모 수녀회 (글라렛 수녀회)’ 설립

18562월 1일 올긴(Holguin)에서 적으로부터의 피격으로 부상

1857이사벨 여왕의 고백 신부로 임명됨

1868프랑스로 추방됨

1869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참석하여 교황 무오류성 옹호

1870추방과 박해로 퐁프로이드(Fontfroide)의 시토 수도원에서 은신 중 10월 24일 선종

19342월 2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품에 오름

19505월 7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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